“다 잘될 거야”라는 말 너머의 진정한 위로: 부활에 뿌리내린 산 소망과 경청의 사역

데이비드 클라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클라크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인들이여, 아파하는 친구에게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라'(Dear Christians, stop promising hurting friends it will get better)를 10월 2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이비드 M. 클라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세상을 넘어서는 기쁨』의 저자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사랑하는 사람이 중요한 소식을 기다리며 힘겨워할 때, 우리는 위로를 건네고 싶어 한다. 앞으로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기를 바라며 마음을 다독일 말을 찾는다. 그러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거나, 곧 기도의 응답이 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성급하게 장담하기도 한다.

선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말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이미 고통과 불확실성을 견디는 사람에게 우리가 보장할 수 없는 확신까지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소망은 내일에 대한 낙관적인 예측보다 굳건한 토대를 지닌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주어진 ‘산 소망’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삶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저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세상을 넘어서는 기쁨』 10장에서 하나님께 뿌리를 둔 소망과 상황의 변화에 의존하는 소망을 구분했다. 간절히 기도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을 때, 이 차이는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기다림의 시간을 지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면서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부활을 굳게 믿으면서도 오늘 하루를 견디기 버거울 수 있다. 교회와 가정, 친구 관계 안에는 이러한 마음을 솔직하게 나눌 자리가 필요하다.

위로는 경청에서 시작된다

해석이나 조언을 건네기에 앞서 상대방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무 말 없이 곁에 앉아 손을 잡아주기만을 바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겪는 시련의 의미를 우리가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다. 기다림이 왜 길어지는지 우리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는 범위를 넘어선 상투적인 위로보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일이 더 진실한 위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걱정되고, 이 시간을 혼자 견디게 하고 싶지 않아.”

함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과를 장담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바라는 좋은 소식을 하나님께 솔직히 구할 수 있다. 불확실한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필요한 지혜와 힘, 위로와 동행을 간구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과 자신의 바람을 숨김없이 아뢰는 정직함이 함께 담긴다. 원하는 결과를 구하는 일과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함께할 수 있다.

소망은 꾸준한 돌봄으로 드러난다

로마서 15장 13절은 이렇게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짓거나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고통받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상대방이 당장 희망적인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곁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아직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침묵을 서둘러 채울 필요도 없다. 첫 만남이 끝난 뒤에도 안부를 묻고, 약속한 도움을 꾸준히 실천해야 한다.

짧은 방문과 따뜻한 식사 한 끼, 잊지 않고 거는 전화 한 통은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이어가는 것은 상대방을 기억하고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감사도 이러한 관계 안에서 나눌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의 슬픔을 지켜보는 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감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감사할 일을 찾으라는 말이 고통을 더 이상 표현하지 말라는 요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아픈 부분을 솔직하게 나누면서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함께 기억할 수 있다. 감사와 슬픔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같은 마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바라는 것을 구하되 소망의 토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좋은 소식을 바란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오랫동안 기다린 기회가 열리며, 어려운 상황이 나아지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소망은 그 소원이 기대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베드로전서 1장 3~4절은 그 소망의 근거를 일깨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것이 내일의 소식을 예측하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는 소망이다. 눈앞의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미래는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 위에 서 있다.

이러한 확신은 격려를 더욱 정직하게 하고 돌봄에 인내를 더한다. 언제 문제가 해결될지 장담하는 대신 다시 찾아가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안다는 듯 설명하기보다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다. 확신에 찬 간증을 요구하기보다 두려움 속에서 간신히 꺼내는 기도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내일이 달라지지 않아도 곁에 머무는 사랑

오늘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믿는 일은 함께할 수 있다. 슬픔을 인정한다고 소망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며, 소망을 말한다고 슬픔을 서둘러 끝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힘겨운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내일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주는 소망이 필요하다. 그 소망은 결과에 대한 섣부른 약속보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과 곁을 지키는 사랑을 통해 전해진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일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함께 기억하고, 자신이 약속한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보다, 어려움이 계속되더라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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