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천사로 가장한 어둠: 핼러윈의 계절에 돌아보는 영적 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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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으스스한 귀신의 집, 그저 꾸며낸 이야기일까?"(Boo! Haunted houses aren’t real, but …)을 10월 1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0월이 찾아왔고 핼러윈도 가까워졌다. 필자에게는 좋아하는 초콜릿바 ‘쓰리 머스커티어스’를 평소보다 많이 먹고,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큰딸과 무서운 영화 몇 편을 함께 보는 시기다. 둘러보니 선택할 작품도 넘쳐난다.

케이블TV와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셀 수 없이 많다. 과장해서 말하면 129만 432개쯤 되는 듯하다. 이처럼 많은 프로그램이 제작된다는 사실은 세속화된 사회에서도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종교가 없다고 답하는 사람들도 물질세계 너머의 무언가를 믿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G. K. 체스터턴은 『영원한 인간』에서 자연이 언제나 초자연을 찾는다고 표현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향한 인간의 관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령 프로그램 출연자들이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했다고 주장할 때,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초자연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먼저 사기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당사자들도 이를 알면서 시청자를 속이는 경우다. 초자연적 존재와 소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온 사기꾼들의 역사는 오래됐다.

다음으로는 당사자가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험 자체는 일어났더라도 그 원인에 대한 판단이 틀릴 수 있다. 특정한 믿음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은 평범한 사건도 자신이 기대하는 현상의 증거로 받아들이곤 한다. 기독교 회의론자들 역시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을 설명할 때 이러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오락을 위한 연출일 수도 있다. 시청자의 재미를 위해 사건을 각색하고,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참여하는 경우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실제 초자연적 현상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래전 필자에게도 지금까지 초자연적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 위자보드에서 겪은 일

필자가 여섯 살이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필자와 어린 조카가 가지고 놀도록 위자보드를 꺼내주셨다. 위자보드는 글자와 숫자가 적힌 판 위에 손을 얹은 포인터를 움직이며 영적 존재와 소통한다고 여기는 도구다. 어머니가 사용법을 간단히 설명한 뒤, 필자와 조카는 놀이에 몰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와 조카는 거실에 있던 어른들에게 포인터가 저절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특히 미시간주립대를 막 졸업한 큰누나는 더욱 회의적이었다. 큰누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필자의 누나이자 조카의 어머니였다.

필자와 조카가 계속 같은 주장을 하자 누나는 시험해 보겠다는 듯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철자를 맞춰봐.”

필자의 기억으로는 포인터가 그 단어의 철자를 차례로 짚었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단어는 당시 필자나 조카가 알고 있던 어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어른들은 다른 어려운 단어들도 제시했고, 필자는 포인터가 그 철자들 역시 정확히 짚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는 이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당시 상황을 물질적 원인만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꼈고, 비물질적인 지적 존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받아들였다. 다만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에 대한 필자의 기억과 해석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이어진다. 만일 어떤 경험이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그 경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유령이나 폴터가이스트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인가.
파이크 주교의 경험을 바라본 엉거의 해석

댈러스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친 신학자 메릴 엉거(Merrill Unger)는 이러한 질문을 성경적 귀신론의 관점에서 다뤘다. 그는 관련 저서를 여러 권 집필했으며, 그중 하나가 『파이크 주교의 심령 현상』(The Haunting of Bishop Pike)이다.

이 책은 성공회 주교 제임스 파이크가 아들의 죽음 이후 겪었다고 주장한 일련의 현상을 다룬다. 엉거의 설명에 따르면, 파이크의 스무 살 아들은 1966년 2월 4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파이크는 아들과 함께 지냈던 케임브리지의 아파트에서 물건이 움직이는 등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데이비드 바 신부와 마렌 버그루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이를 목격했다고 전해진다.

이전까지 사후 세계에 회의적이었던 파이크는 죽은 아들이 자신과 소통하려 한다고 믿게 됐다. 그가 경험한 현상에는 아들의 습관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이 있었고, 아들만 알 법한 정보가 전달됐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파이크는 아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영매를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받은 메시지 가운데 일부를 아들이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자신의 경험과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을 담은 『반대편』(The Other Side)을 출간했다.

그러나 파이크가 자신의 경험을 확신했다는 사실과, 그가 경험의 원인을 정확히 이해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엉거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했다.
놀라운 경험이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엉거는 파이크가 죽은 아들과 소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악한 영에게 속았다고 해석했다. 그 근거로 고린도후서 11장 14절을 제시했다.

그는 염력과 환상, 자동기술, 입신 중 발화, 물질화, 유령 출현 등으로 불리는 심령 현상을 논하면서, 실제로 보이는 현상이 오히려 기만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위험은 단순히 경험이 거짓일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어떤 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더라도,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까지 참되거나 선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었다.

엉거는 사탄이 노골적인 위협보다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접근할 때 더 큰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파이크의 경우에도 아들을 잃은 슬픔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경험을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 것이다.

또한 엉거는 파이크가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분별할 기준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는 확신이 그 현상의 의미를 판단하는 기준까지 대신하게 됐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돌아봐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그 의미를 판단할 것인가. 감정의 강렬함이나 경험의 생생함만으로 그 출처와 메시지를 신뢰할 수 있는가.
파이크의 죽음과 엉거의 경고

파이크는 1969년 9월 사해 인근의 황량한 사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이야기를 엉거는 심령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사례로 제시했다.

그러나 파이크가 겪었다고 주장한 현상들과 그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이 이야기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엉거의 설명은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다.

엉거가 강조한 요지는 악한 영의 권세에서 비롯된 초자연적 경험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호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경험에 매혹되는 일이 사람을 더 깊은 기만과 영적 위험으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필자가 이 사례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도 분별의 중요성이다.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선하거나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성경이 경고하는 영적 기만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심령 프로그램은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호기심만이 아니다. 경험의 출처와 의미, 그것이 이끄는 방향을 살피는 태도다.

필자가 생각하는 진짜 위험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나는 일 자체보다, 그 경험을 충분히 분별하지 않은 채 신뢰하고 따르는 데 있다. 놀라운 경험 앞에서도 판단의 기준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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