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 69] 우리나라 공산주의의 배경과 폭력(1)

오피니언·칼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해안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대원들. 가장 먼저 옹벽을 올라간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맨 위)는 북한군 벙커에 수류탄을 던지려다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닥에 떨어뜨린 수류탄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Naval Historical Center

나라 없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 없는 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국민 각자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정체성이 올바로 세워지고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고 단합하는 참된 애국심으로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1. 3·1 독립운동 이후 공산화의 배경

3·1 독립운동으로 국권 회복을 기대했지만,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해지자, 허탈감에 빠진 국민의 마음을 강하게 유혹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레닌의 주도하에 일어난 볼셰비키 피의 혁명이 성공하자,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제3국 공산당)이 설립된 후에 각국의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원과 통제로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1918년 1월 22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 등이 공산당 한인 지부를 조직했고, 6월 26일에 이동휘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립하고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공산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를 의지해서 항일운동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토지를 나누어 주고 평등하게 잘사는 좋은 세상이 온다고 국민을 유혹하였고,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도울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공산당 조직에 가담하고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꽤 있었다.

2.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1919년 8월 이동휘는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정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임정에서 항일사회당을 조직하고 1921년 1월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여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때 책임비서가 박헌영이었으며, 1921년에 서울청년회, 1924년에 화요회, 북풍회를 조직하고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박헌영을 중심으로 20여 명이 창당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4월 18일, 25세의 박헌영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3. 6·10 만세운동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 청년들이 일본 경찰을 폭행하자, 조선총독부는 전국 공산주의자 일체 검거령으로 37명이 수사를 받으면서(박헌영 서대문형무소 수감) 1, 2차 검거로 135명이 체포되었다.

4. 공산주의 지하운동

미치광이 행세로 석방된 박헌영은 1927년 소련으로 도망가서 레닌학교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이론 사상가가 되었고, 귀국해서 비밀리에 세포를 조직·지원하다가 1934년 체포되어 6년간 복역했다. 감옥을 나온 뒤 김삼룡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통해 전국적인 공산당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경성콤그룹 멤버들은 장사꾼이나 노동자로 위장하여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독서클럽과 중간자 지도자를 교육하고 훈련하여 세력을 넓혀 갔다.

1940년 12월부터 이들의 지하조직이 폭로되어 1942년 12월 대부분의 간부가 투옥되면서 경성콤조직은 자동 해체되었지만, 박헌영은 광주 연와 벽돌공장에서 김성삼이라는 가명으로 노동을 하며 지속적으로 공산주의 지하조직을 관리해 왔다.

5. 해방 이후 공산주의 확산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주권을 갖지 못했다.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자력이 아닌 타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1945년 6월 21일 미군은 50만 명을 동원하여 1만 2천 명이 전사하고, 군함 100척을 잃고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은 핵실험에 성공하고,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에 일본의 군수기지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14만 명이 사망하고 8만여 명이 부상했다. 8월 9일 오전 11시에 나가사키에 다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8만 명이 죽고 7만 5천 명이 부상하자 8월 10일 일본은 급하게 항복하겠다고 연락을 해오고, 8월 15일 정오 124대 일왕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이미 우리나라는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회담, 1945년 2월 10일 얄타회담, 1945년 7월 26일 포츠담회담을 통해 독립을 보장받았고, 일제도 동의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하겠다고 했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에 참전하여 당일 만주를 점령하고, 8월 13일에는 나진과 청진을 점령하고, 8월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다. 이에 미국은 딘 러스크 대령(후에 국무장관)과 찰스 본스틸 대령(후에 8군 사령관)이 38선을 긋게 하여, 38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기로 결정했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상륙한 미군이 9월 9일 중앙청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미군은 1941년 12월 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4년 동안 싸워서 일본을 패망시켰는데, 소련은 겨우 8일간의 참전으로 한국의 38도선 북쪽을 점령하여 한국을 분단시켰다. 그래서 한국의 분단 원인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과 더불어, 우리 스스로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소련군이 먼저 북한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범희 목사

사실 당시 일본의 스즈키 수상은 1945년 7월 28일 포츠담 선언에 동의하고 항복한다고 했지만, 1억 총옥쇄(‘옥처럼 부서진다’는 뜻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군부가 1억 국민이 끝까지 싸우다 죽자며 강요한 군국주의 구호)를 주장하는 일본군 장교들 때문에 머뭇거리다가 원자폭탄을 맞고서야 8월 15일 항복했다. 예정대로 7월 28일 일본이 항복했다면 소련군이 한국에 올 일도 없었고,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일본인이 희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쉽고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다. <계속>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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