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일까.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 병들고 변질됐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라고 말씀한다. 이는 결국 삶의 중심과 사랑의 대상이 변질됐음을 보여준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과 형들 사이에 일종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셉은 곡식을 사러 온 형들에게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각별히 사랑해 형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굳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을까.
요셉은 베냐민을 통해 형들이 과거와 달라졌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약 형들이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다면, 요셉이 베냐민에게 더 많은 음식을 주고 특별히 대했을 때 과거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기와 질투를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과연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사랑의 실천이 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 영혼이 구원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난다. 한 사람이 변화되면 가정이 변화되고, 공동체와 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주목할 인물이 유다다. 유다는 베냐민을 반드시 아버지에게 다시 데려오겠다며 자신이 그의 담보가 되겠다고 나섰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주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 희생을 선택했다.
유다의 희생과 야곱의 결단
유다의 간곡한 요청 앞에서 야곱의 태도도 달라졌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사람과 사건, 환경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게 하신다. 때로는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을 돌아보게 하시기도 한다.
마침내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결단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우리가 당장 이해하지 못하는 뜻이 있을 수 있다. 당시 기근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에게는 양식이 절실했다. 야곱도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베냐민만큼은 보낼 수 없었다.
양식은 필요하지만 베냐민을 보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때 넷째 아들 유다가 나서 베냐민의 담보가 되겠다고 했다. 자신과 베냐민의 운명을 묶어 그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유다의 책임은 단순히 자신의 문제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가족 전체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야곱의 온 가족이 기근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다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다. 유다가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놓았던 모습은 훗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도 이러한 자기희생과 화합이 필요하다. 유다의 결단과 야곱의 결단이 한 가족을 살리는 길로 이어졌듯이, 오늘날에도 여와 야가 하나 되고 동과 서가 화합하며 남과 북이 평화를 이루어 가기를 소망한다.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는도다”
처음에 야곱은 아들들이 베냐민까지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자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는도다”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말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괴롭히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야곱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시고 그 뜻을 이루어 가고 계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괴롭게 하는도다”라는 말은 당시 야곱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 역시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쉽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준비하고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고 고백했다.
계속되는 기근과 아들들의 간곡한 요청 앞에서 결국 베냐민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야곱에게 베냐민은 특별한 아들이었다.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이었고, 요셉마저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마지막까지 붙들고 싶은 존재였다.
그런 베냐민을 보내기로 했다는 것은 야곱이 자신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내려놓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야곱에게는 참으로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야곱의 베냐민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맡기지 못하는 마지막 영역은 없는가.
야곱이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새로운 길이 열렸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기희생적인 결단과 믿음이 필요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셉의 형들
애굽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지난번 곡식을 사서 돌아가는 길에 자신들이 지불했던 돈이 자루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 배의 돈을 가지고 왔다.
형들은 자신들이 돈을 숨긴 것이 아니라고 거듭 설명했다. 누군가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돈을 넣어둔 것은 아닌지 두려워했다.
그러나 요셉의 청지기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므온을 데려왔으며, 그들에게 발 씻을 물을 주고 나귀에게 먹일 여물까지 마련해 편히 쉴 수 있도록 했다.
뜻밖의 환대를 받은 요셉의 형들은 오히려 더욱 당황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과거 요셉에게 저질렀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이야기 속 요셉의 형들이 보여준 두려움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질적인 기준만 놓고 본다면 과거보다 훨씬 많은 것을 누리는 시대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다.
성경은 이러한 두려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와 연결해 설명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 역시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기독교 신앙은 그 해결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 기쁨과 감사,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움보다 믿음을 선택하고 희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