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미디어, 그리고 지정학의 지각변동: 9.11 테러가 남긴 뼈아픈 교훈들

로날드 맥밀란 박사. ©iirf.global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로널드 맥밀란 박사의 기고글인 '9·11 테러 25년 후, 다시 돌아보는 그날의 기억'(A personal reflection 25 years after September 11)를 9월 1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로널드 맥밀런 박사는 박해받는 이들을 돕는 일에 40년 동안 기자, 학자, 활동가로 헌신해 왔다. 그는 종교 갈등에 초점을 맞춘 세계 최초의 뉴스통신사인 뉴스 네트워크 인터내셔널을 공동 설립했으며, 2006년에는 박해받는 교회에 관한 대표적 저서 『견디는 믿음: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필수 안내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말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 스피치 교육 회사의 대표이자, 종교 자유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세계 최초의 싱크탱크인 국제종교자유연구소의 의장 겸 글로벌 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당시 필자는 미국행 여행을 예약하고 있었다. 여행사 직원은 갑자기 “아, 이번 발권은 마저 처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짧게 “TV를 켜보세요. 뉴욕에서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다행히 실제 사망자 수가 수만 명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장면을 우리는 마치 수만 번이라도 본 듯 반복해서 지켜봐야 했다.

필자는 당시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고 사람들이 추락하는 장면을 왜 저토록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불과 30분짜리 뉴스 보도 안에서도 충돌 장면이 몇 차례씩 반복됐다. 정말 무책임한 보도라고 생각하던 순간, 필자는 루이스 리처드슨(Louise Richardson)이 설명한 테러리즘의 세 가지 ‘R’을 떠올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대규모 폭력을 저지를 때 원하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다. 혁명(Revolution), 자신들의 진영 안에서 얻게 되는 명성(Renown), 그리고 적의 반응(Reaction), 특히 과잉 반응이다. 그들은 대개 뒤의 두 가지는 얻어내지만 첫 번째, 즉 자신들이 꿈꾸는 혁명까지 이루지는 못하며, 9·11 역시 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필자는 사건 당일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가 네 가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1. 미국의 과잉 반응

첫 번째 예측은 미국이 분노 속에서 과잉 반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9·11 직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미국은 전 세계적인 동정과 연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압박해 오사마 빈 라덴을 넘겨받도록 만드는 방안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논의에 작게나마 관여하고 있었다. 이 전략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내부에 갈등을 일으키고 그들의 결속을 흔들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었다. 탈레반에게 빈 라덴은 보호해야 할 ‘손님’이었고, 그를 넘겨주는 것은 자신들의 문화적·정치적 명분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체제 자체의 파괴라면 결국 그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고 필자는 보았다.

필자는 지금도 이 방법이 일정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행정부가 상당한 인내심을 갖고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미국 역시 처음에는 외교적 압박의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 작전이 시작됐다. 대규모 폭격과 이후의 지상전이 이어졌고, 미국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이 작전은 알카에다를 크게 약화시키고 아프가니스탄 사회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미국이 ‘눈에 보이는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정치적 압박을 얼마나 크게 받고 있었는지도 보여줬다.

2. 서구 사회의 종교에 대한 반작용

두 번째 예측은 서구 사회가 종교적 신앙 자체를 21세기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는 강한 반작용을 보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가 대표적인 목소리로 떠올랐고, 미국에서는 샘 해리스(Sam Harris)와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이 여기에 합류했다. 이른바 ‘신무신론(New Atheism)’ 운동은 이후 여러 베스트셀러를 탄생시켰다.

2006년 출간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은 한동안 서구 지성계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영향력은 상당 부분 약화됐다. 기독교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는 신무신론 운동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후 빠르게 동력을 잃었다고 평가했다.

2020년대 청년층의 영적 삶을 연구한 레모르나 애쉬(Lamorna Ash) 역시 젊은 세대가 과거 신무신론자들의 주장에 이전만큼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종교 비판이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과 충분히 맞닿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한동안 대중 강연이나 토론에 나설 때마다 모든 종교인을 잠재적인 극단주의자로 취급하는 공격적인 무신론자들과 논쟁할 준비를 해야 했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흐름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3. 세계 정치의 무대로 돌아온 종교

세 번째 예측은 종교가 다시 세계 정세를 설명하는 중요한 독립 변수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현대 국제정치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종교가 국가 간 정치의 중심에서 점차 밀려나고, 국가의 이해관계와 주권이 국제질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 이후 세계는 종교를 그렇게 간단히 주변부로 밀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를 단순히 빈곤이나 정치적 소외, 서구 제국주의의 부산물로만 설명할 수 없으며, 종교적 신념과 해석 자체도 중요한 변수로 다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 영국 총리는 이런 변화의 중요성을 비교적 일찍 인식한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2008년 ‘토니 블레어 신앙 재단(The Tony Blair Faith Foundation)’을 설립했다. 종교가 국제정치와 국가 안보, 사회적 갈등에서 갖는 의미를 연구하고 정책적 조언을 제공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재단은 이후 보다 포괄적인 성격의 ‘토니 블레어 세계 변화 연구소’로 개편됐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종교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실제 종교 현장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문가들과 충분히 협력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4.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디어

네 번째 예측은 언론과 정책 분석가들이 종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정부의 단순화된 설명을 반복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9·11 이후 서구 정부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극단주의자들은 종교의 본질을 배신한 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설명에는 중요한 의도가 있었다. 평범한 무슬림 전체를 테러리스트와 동일시하는 위험한 일반화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데 있었다. 어떤 종교도 완전히 획일적인 단일체가 아니다. 동일한 종교 안에서도 경전과 전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크게 다를 수 있으며, 평화를 강조하는 흐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소수 전통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모두 역사 속에서 폭력을 정당화한 집단과 사상가들을 낳았으며, 이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특정 종교 전체를 폭력적인 종교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 내부의 다양성과 실제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는지를 더 정밀하게 살펴봐야 한다는 뜻이다.

비교종교학자 존 보우커(John Bowker)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오랫동안 종교가 평화를 촉진하는 힘이 될 수도 있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폭력의 정당화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왔다. 그러나 당시 많은 미디어 논평에서는 이러한 복잡성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필자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변화였다. 그러나 이후 25년 동안 필자가 미처 내다보지 못했던 네 가지도 있었다.

1.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미디어

첫 번째로 예상하지 못한 것은 언론계가 관련 전문가들에게 생각보다 훨씬 적게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이었다. 필자는 당시 종교 분쟁을 연구하고 있었고, 9·11 이후 종교와 폭력의 관계가 국제사회의 핵심 의제로 떠올랐기 때문에 언론과 정책 담당자들이 상당한 자문을 요청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어느 순간 모두가 갑자기 종교 분쟁 전문가가 된 듯했다. 필자는 이를 통해 여론 주도층과 칼럼니스트들이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해석의 틀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경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 특히 분노와 갈등을 자극하는 방식의 해석은 복잡한 현실보다 훨씬 전달하기 쉽지만, 그런 단순화가 실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2. 정책 엘리트들이 놓친 현장의 현실

두 번째는 정책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사회의 가장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던 한 미군 장성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유명한 이슬람학자의 브리핑을 듣고 나왔는데, 그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부대원들이 실제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마을에 들어가면 종교적 명분으로 미군과 싸우기를 원하는 무장세력과 맞닥뜨리곤 했다. 그 장성은 이 두 현실이 어떻게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답답해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종교 공동체 전체를 폭력적인 집단으로 일반화하는 것도 틀렸지만, 반대로 현장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극단주의적 신념을 부정하는 것도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 20년 가까이 개입하는 동안 분명 여러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교육과 의료, 여성의 사회 참여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성과가 나타난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현지 농촌 사회와 부족 구조, 종교적 정체성, 역사적 기억에 대한 오해가 정책 실패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은 정책 엘리트들이 현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교훈이 됐다.

3. 이라크 침공과 무너진 신뢰

세 번째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2003년 이라크 침공이 서구 사회의 정치적 신뢰에 남긴 장기적인 충격이었다. 당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WMD)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이 전쟁의 핵심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됐고, 영국에서도 전쟁을 앞두고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필자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제거 자체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둘러싼 정보와 논거가 지나치게 확정적인 사실처럼 제시되는 데에는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밝혀진 사실들은 당시 정보의 상당 부분이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원과 불완전한 분석에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

콜린 파월(Colin Powell) 미국 국무장관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의혹을 설명한 다음 날, 필자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한 유명 변호사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필자에게 “내 직원 가운데 누군가 법정에서 저런 수준의 논리를 폈다면 그날 바로 해고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파월 자신도 훗날 당시 연설과 정보 판단에 대해 후회를 표명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라크 전쟁은 특히 영국에서 국가와 시민 사이의 신뢰 관계가 흔들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기득권층은 “우리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이후 그 확신이 근거가 빈약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시민들은 “당신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반응했다. 이때 생긴 신뢰의 공백은 이후 포퓰리즘의 부상과 엘리트에 대한 불신, 그리고 정치·미디어·관료 조직이 더 이상 평범한 시민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필자는 본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해석이다. 필자의 시선은 언제나 권력의 중심보다는 교회와 시민사회가 활동하는 현장, 국가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지역과 공동체에 가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트와 현장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의 격차가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4. 중국의 부상

그러나 필자는 9·11이 지난 25년 동안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같은 해인 2001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이 더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로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이 세계 무역 체제에 깊숙이 편입될수록 경제적 개방이 정치적 자유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국 경제가 세계와 더 긴밀하게 연결되면 국내 정치 역시 점진적으로 개방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그런 예상과 다르게 전개됐다.

중국은 세계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면서도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를 유지했고, 시진핑 집권 이후에는 오히려 중앙집권적 통치가 더욱 강화됐다. 동시에 중국의 경제력은 빠르게 성장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사실상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했고 소련은 붕괴했으며, 미국에 대등하게 맞설 경제적·군사적 경쟁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은 이 일극 체제를 점차 변화시켰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대한 경제·전략적 경쟁자가 맞서는 구조에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세계적인 무역과 투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동시에 서방 중심의 국제질서와는 다른 대안적 영향권을 확대하려 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앞으로 수십 년간 국제정치의 핵심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9·11 이후 우리가 맞닥뜨린 세 개의 전쟁

9·11은 종교적 극단주의,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가 국제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2001년은 또 다른 거대한 경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이다.

이것은 9·11 직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전면적인 군사 충돌이라기보다 경제와 기술, 외교와 안보, 국제질서를 둘러싼 장기적인 경쟁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어쩌면 세 번째 거대한 도전에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초지능 인공지능(AI)의 등장 가능성이다.

AI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발전할 경우, 그 영향은 단순히 일자리나 산업 구조의 변화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국가 권력과 군사력, 정보전, 경제질서는 물론 인간 사회 자체의 구조를 뒤흔들 가능성까지 논의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미래가 반드시 현실이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위험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9·11과 같은 사건은 적어도 위협이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중국의 부상이나 AI처럼 천천히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는 사람들이 위험을 인식하기도 전에 세계의 구조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25년 전 필자는 9·11 이후 벌어질 몇 가지 일을 예상했다. 일부는 맞았고 일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난 25년이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가 터진 뒤에야 현실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모든 전문 지식을 불신해서도 안 된다. 현장을 살피고, 복잡성을 인정하며,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9·11은 세계를 뒤흔든 끔찍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앞으로 또 다른 각성의 사건이 오기 전에,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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