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완다 알거의 기고글인 ‘문제는 예언 자체가 아니라, 예언의 부재다’(Prophecy isn't the problem. Absence is)를 8월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완다는 35년 넘게 예배 인도자, 교사, 저자, 치유·상담 사역자, 강연자로 섬겨 왔다. 아홉 권의 책을 집필한 저자로서,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통해 성숙해 가도록 격려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사무엘의 이야기에는 오늘날 교회에 유독 깊은 울림을 주는 무언가가 있다.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사무엘이 처음 등장했을 때 하나님의 집은 깊이 병들어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직을 남용했고,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으며, 노골적인 부도덕을 저질렀다. 예배의 형식과 제도의 뼈대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었다.
성경은 바로 이 시기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두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연결돼 있을지도 모른다. 정보와 의견, 수많은 메시지, 저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목소리로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진리를 갈망한다. 그러나 진정한 해답은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얻거나 분별력을 키우는 데 있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단 하나의 장소, 곧 그분의 임재 앞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사무엘은 남들이 당연하게 여긴 것을 소중히 품었다
엘리의 집안을 둘러싼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기록한다(삼상 3:3).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심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소홀히 여길 때 사무엘은 오히려 그 거룩함 안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이 자신의 지위를 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할 때,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이 당연하게 여기거나 가볍게 취급하던 것을 마음 깊이 보물처럼 품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마침내 그가 드린 대답은 이후 그의 평생을 설명하는 고백이 됐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그 순간 무언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던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성경은 마침내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삼상 3:21).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사무엘은 시대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그가 신비한 계시 자체를 좇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타협으로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죄의 유혹보다 훨씬 크고 두려운 분을 경외했다. 그는 여호와의 임재를 소중히 여겼고, 바로 그 은밀한 자리에서 잃어버렸던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형성된다
이러한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된다. 이사야의 사역도 어떤 메시지를 들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사 6:1).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섰을 때 이사야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그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사명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정결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했다. 그런 뒤에야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예레미야 역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을 통해 같은 우선순위를 보여준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council)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렘 23:18). 이어 하나님은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 23:22)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책망은 단순히 그 선지자들이 ‘틀린 말’을 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회의, 곧 그분 앞에 서 있는 자리에서 나오지 않은 채 말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하나님 앞에 충분히 서보지도 않은 채 하나님을 대신해 말하려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예언적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며,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먼저 그분의 임재 앞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종교적인 활동을 늘린다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 선하심과 권위를 실제로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형성된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볼 때 다른 모든 것 역시 제자리를 찾는다.
‘엘리의 아들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는 부끄러운 죄들이 드러나고, 잘못된 권력과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정화의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동시에 ‘사무엘들’을 세우셔야 한다. 교회에는 화려한 무대보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사랑하고, 사람들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갈망하며, 군중의 여론보다 그분의 음성을 더 귀하게 여기는 남녀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별한 예언자 몇 사람만이 아니다. 참된 신자의 모습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제단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어떤 응답이나 계시, 방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을 알기 위해 은밀한 자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하나님의 임재는 언제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분에게서 멀어질 때 하나님은 단순히 초자연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백성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이키기 위해 그들을 보내셨다.
사무엘의 메시지도 그러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삼상 7:3).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법을 배웠던 한 사람이 이제 온 민족을 향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가져오는 힘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자신과 우상, 헛된 야망과 세상의 유혹에서 돌려 하나님을 다시 마땅한 자리에 모시게 한다.
임재가 빚어낸 거룩한 무게감
사무엘이 죽고 수 세기가 흐른 뒤에도 하나님은 백성을 위해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모세와 함께 사무엘을 언급하셨다(렘 15:1). 이는 사무엘이 남긴 영적 유산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증언한다(삼상 3:19). 그러나 그가 기억된 이유는 단지 말의 정확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의 권위는 단지 입에서 나온 말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의 삶에는 여호와의 임재 안에서 빚어진 영적인 무게감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이미 말이 넘쳐난다. 정보는 끝이 없고, 뛰어난 달변가와 영향력 있는 플랫폼도 많다. 설교와 가르침, 예측과 견해를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무게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순결함과 영적인 맑음, 거룩한 절제가 있다. 카리스마나 은사, 학위나 유창한 언변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기억할 때 형성된다.
이러한 흔적은 예언적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교사, 부모와 비즈니스 리더, 공직자,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삶에도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데 몰두하기 전에 먼저 그분 ‘앞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제단으로 부르시는 음성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교회 안에 다시 살아나고, 그것이 사회를 향한 거룩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원한다면 시작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 일은 반드시 또 하나의 대규모 집회나 화려한 전략, 새로운 플랫폼이나 대중 캠페인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세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보이지 않는 은밀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마음을 가진 세대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 은밀한 임재의 자리를 귀하게 여기고, 그분의 말씀 앞에 떨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외하고, 그분의 마음을 알기 위해 오랫동안 잠잠히 머무는 사람들을 말이다.
어쩌면 그때 세상은 자신들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무언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말은 많지만 무게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렀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