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한나 레이프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인이 온라인에 글을 올리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6가지 질문'(6 questions Christians must ask before posting online)을 8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한나 레이프는 미국 최대 규모의 여성 공공정책 단체인 ‘컨선드 위민 포 아메리카(Concerned Women for America)’에서 입법 전략가(Legislative Strategist)로 활동하고 있다.
‘신흥 기독교 우파’로 분류되는 조엘 웨본(Joel Webbon) 목사는 지난해 이런 글을 올렸다: “여성들은 소셜미디어에서 로그아웃하고 파이 굽는 일에나 전념해야 한다. 기왕이면 애플파이로.” 이 글을 보고 딱히 로그아웃해 파이를 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불쾌했을 뿐이다.
웨본은 사람들의 관심과 이른바 ‘조회수’를 끌어모은 것 외에는 별다른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필자 역시 화면을 계속 넘겼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소셜미디어 안에 존재하되 그 세속적인 방식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오늘날 세상의 많은 일이 화면 안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 역시 어김없이 인터넷 공간까지 따라온다.
그렇다면 게시물과 댓글, 영상 하나를 올리기 전에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점검해야 할까? 다음 여섯 가지 질문은 온라인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구별됨을 지키는 데 하나의 실질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1. 나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진리와 사랑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 먼저 진리가 빠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관심일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의 진리 밖에서 진정한 사랑은 성립할 수 없다. 복음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결혼과 성에 관한 창조 질서의 진리를 외면하면서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
죄를 긍정하는 것은 당장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사랑은 아니다. 죄를 알고도 외면하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죄에 매인 영혼을 향한 무관심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사랑이 빠진 진리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헛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1-3)
예언과 지식, 사실과 논증, 자선 행위뿐 아니라 오피니언 칼럼과 릴스, 팟캐스트, 상태 업데이트, 댓글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결국 요란한 소리에 그칠 수 있다.
지난달 유튜버 제시 리지웨이(Jesse Ridgeway)는 엑스(X)를 통해 태아가 다운증후군 진단을 받았다는 이유로 임신 20주 차에 낙태를 했다고 밝혔다.
필자 역시 이 게시물에 답글을 달았다. 그의 행동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이용자들은 그에게 살해 협박까지 쏟아냈다. 그것 역시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하나를 잃으면 결국 둘 다 잃는다.
예수님을 ‘낙태 찬성론자(pro-choice)’라고 표현하고 성별이 여섯 개라고 주장하는 텍사스의 상원의원 후보 제임스 탈라리코(James Talarico)처럼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진보적 혹은 이단적 기독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빠지는 함정은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동시에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모두 품고 말해야 한다.
2. 나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두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내 말은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 것인가?’ 이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진리를 타협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전략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옳은 말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그 말을 통해 회개와 변화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보여준 것도 바로 이런 태도였다. 우리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설득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 자극하기보다 변화시키고, 상대를 짓밟아 이기기보다 진리로 이끌기를 바라야 한다. 진리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다.
데일 파트리지(Dale Partridge) 목사의 엑스 계정은 이에 대한 좋지 않은 사례가 될 수 있다. 파트리지는 미국 수정헌법 제19조, 즉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조항의 폐지를 자주 주장하며 “여성은 이끌 수 없다. 대부분의 여성이 사고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글을 올린다.
그가 오늘날 여성 유권자들의 정치적 선택 가운데 우려할 만한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을 수는 있다. 낙태를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가 많다는 사실 역시 그의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적대적이고 설득력 없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면 그 문제의식 자체가 묻혀버린다. 수정헌법 제19조 폐지를 외치는 것은 현실적 해결책이라기보다 논란을 키우는 구호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 결과 정작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들은 귀를 닫고, 메시지는 진리보다 분노를 자극하는 도구가 된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상대를 설득하는 일에는 신중함과 기도, 분별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조와 타이밍, 표현의 강도, 상황과 단어 선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예수님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때에는 성전의 상을 엎으셨고, 또 어떤 때에는 다정하게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5:20)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같았지만, 사람과 상황에 따라 접근 방식은 달랐다.
3. 나는 단지 불평만 하고 있는가?
테디 루스벨트의 말로 알려진 문구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다: “해결책 없이 문제에 대해서만 불평하는 것은 징징대는 것에 불과하다.” 소셜미디어는 불평과 분노를 확산시키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다.
알고리즘은 갈등과 분노, 충돌을 유발하는 콘텐츠에 더 많은 관심을 끌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끊임없이 지적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문제를 드러내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한다면, 가능한 한 무엇이 더 나은 방향인지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비판이 필요할 때는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비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말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고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안도, 소망도, 회복의 방향도 없이 불평만 쏟아낸다면 잠시 게시 버튼에서 손을 떼는 편이 나을 수 있다.
4. 나는 덕을 실천하고 있는가?
보수주의자나 기독교인 사이에서 거칠고 사랑 없는 온라인 담론은 종종 이렇게 정당화된다: “적어도 좌파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러나 단순히 반대편과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덕(virtue)’이다. 우리는 덕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덕을 단순히 어떤 악덕의 반대편이라고만 여긴다. 그러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덕은 결핍과 과잉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용기의 반대는 단순히 비겁함만이 아니다. 비겁함은 용기의 결핍이고, 무모함은 용기의 과잉이다. 둘 다 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극단적 낙태 옹호나 급진적 페미니즘을 비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 역시 올바른 길이 아니다. 닉 푸엔테스(Nick Fuentes)의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적 표현을 서슴지 않고, 유대인을 향한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발언도 해왔다. 이러한 언행은 어떤 정치적 진영에 맞서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극단적인 것이 쉽고 자극적이며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극단성 자체는 결코 덕이 아니다.
한 가지 악덕을 다른 악덕으로 대체하는 과잉 교정 역시 바른 교정이 아니다. 덕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바로 이 어려운 균형을 끝까지 붙드는 일이다.
5. 나는 ‘남 탓’을 하고 있는가?
제2세대 페미니즘 이후 좌파 진영에서는 사회의 여러 문제를 ‘남성’의 책임으로 돌리는 담론이 오랫동안 반복돼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독교인을 포함한 일부 우파 진영에서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여성’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결국 양쪽 모두 같은 ‘남 탓 게임’에 빠진 셈이다. 흥미롭게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는 인간의 타락 직후부터 등장한다.
아담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파트리지 역시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다면 낙태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자주 한다.
그러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내린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은 전원 남성으로 구성돼 있었다. 또한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판결을 뒤집기 위한 운동의 최전선에는 수많은 보수 여성들이 있었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남성이나 여성 가운데 어느 한쪽에 있지 않다.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데 있다. 남성도 죄를 짓고 여성도 죄를 짓는다.
우리 모두 죄인이다. 이 원리는 반유대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회의 악을 유대인이라는 특정 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문제의 근원은 특정 인종이나 성별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죄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 정신을 빼앗기면 결국 승리하는 것은 죄뿐이다.
성화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6. 상대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공개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가?
공개적인 진흙탕 싸움은 교회에 유익하지 않다. 물론 정통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거나 공개적으로 이단적 가르침을 전하는 인물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말하는 것은 신자들 사이의 갈등이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과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개인적으로 다가가라는 성경적 원칙을 갖고 있다.
마태복음 18장은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먼저 그 사람과 직접 이야기하라고 가르친다. 바울 역시 이렇게 권면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8)
그렇다면 같은 신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수 있다: ‘이 사람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인가?’, ‘정말 공개적인 지적이 필요한 사안인가?’
온라인에서는 공개적인 비판이 훨씬 쉽다. 상대를 태그하고, 캡처를 공유하고, 수천 명 앞에서 반박하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쉬운 방법이 반드시 성경적인 방법은 아니다. 교회 안의 갈등이라면 공개적인 승리보다 관계의 회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온라인에서도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온라인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중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말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아무리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아무리 날카로운 논리를 펼치고, 아무리 많은 조회수와 공유를 얻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참된 열매로 이어지기 어렵다.
물 없는 샘이 목마른 사람을 살릴 수 없듯, 요란한 꽹과리 소리만으로 사람을 진리로 이끌 수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사랑 안에서 말하는 진리’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소셜미디어 공간에 존재하되 그 세속적 생리에 동화되지는 말자. 온라인에서도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드러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