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왕이 앞장서서 싸웠다. 그래야 부하들이 더 용기를 내고 승산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 중일 때 다윗이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말로 시작된다(1절).
성공 가도를 달리던 다윗이 변했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다윗의 실패가 시작되고,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그런데 다윗은 왜 전쟁터로 가지 않았을까?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이 생각이 위기를 부른 것 같다.
나이는 50세쯤 되었을까? 중년의 나이, 이 시기가 되면 일반적으로 찬란한 꿈도 사라지고 여전히 고달픈 현실, 뭘 기대하기도 어려운데 천하의 다윗이 중년의 위기를 맞고 위기 극복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할 일을 잊었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멋져 보이지만, 멀쩡한 사람이 맨날 빈둥거리며 낭비하면 멋지기는커녕 보기 싫어진다. 그런데 다윗이 빈둥거리고 있다.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으면 다른 생각을 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가? 다윗도 그랬다. 저녁에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반하고 말았다(2절).
그런데 저녁에 기상? 본문의 뉘앙스를 볼 때 잠깐 즐긴 오수가 아니다. 낮잠 잔 정도가 아니다. 종일 누워 침상에서 뒹군 것 같다. 누적된 피로 때문일까? 성경은 그런 이유로 보는 것 같지 않다. 남아도는 게 시간, 딱히 할 일이 없다. 목표도 없고, 사명도 없다. 하지만 힘은 있는 게 문제였다.
왕궁 옥상에 올라가서 두리번거리다 보게 된 목욕하는 여인, 너무 예쁘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리고 멈추지 못한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만 욕망의 포로가 된다. 결국 믿음의 사람 다윗이 여지없이 무너진다. 몰락의 길을 걷는다.
어떤 사람들은 “여인이 꼬셨다”며 여인의 책임을 거론하지만,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경은 여인의 처신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여인은 그저 수동적일 뿐, 모든 부정행위의 주모자는 다윗이다. 사람을 보내 그 여인에 대해 알아보게 한 것도 다윗,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런데 신하의 보고가 가관이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아닙니까?”(3절) 보고가 의문문이다. 남의 여자, 관심을 가질 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건방진 보고 아닌가? 하지만 이 보고는 “여기서 멈추라”는 하나님의 경고였다.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라는 말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다.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게 천하의 다윗이 무너진 이유다. 그는 품위를 상실했다. 그가 가진 지적 능력, 분별력, 강한 의지, 믿음 모두 다 잃었다.
전령을 보내 그 여자를 데려오게 하고 동침까지 한다(4절). 간음(姦淫)한 것, 혹시 성폭행은 아니었을까? 4절에 나오는 ‘보냈다’ ‘데리고 왔다’ ‘동침했다’는 동사들이 사랑일까? 그저 불타는 욕망과 쾌락을 즐기려는 한 남자의 욕구 아닌가? 주저하는 모습이 없다. 겸손한 모습도 없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없다. 오직 불타는 욕망의 포로일 뿐, 믿음의 사람, 용기의 사람, 사려 깊은 지혜와 총명의 사람 다윗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속물적인 남성에 불과하다. 다윗의 부끄러운 실패,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가 죄를 낳기 때문이다
죄는 흔적을 남긴다고 했던가. 여자가 임신을 하고 말았다. 죄가 발각될 위기, 비상이 걸렸다. 다윗은 얼른 덮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말씀 그대로다. 충성스러운 부하의 목숨까지 빼앗는다. 불륜에 살인교사, 가중처벌을 받아야 할 상황, 다윗은 죽음의 길을 걷는다.
구체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 우선 절제하지 못한 쾌락의 열매가 너무 쓰다. 심각하다. 급기야 다윗은 전선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인다. 특별 휴가가 여인의 정조를 짓밟은 다윗의 계략이다. 간악한 의도, 얼른 밧세바와 동침시켜서 죄의 흔적을 덮으려 한다. 그런데 생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고 일이 자꾸 꼬인다.
우리아를 만나 간단히 전선 상황을 묻는다(7절). 그리고 우리아에게 집으로 내려가라고 강력하게 종용한다. 8절에서 13절에 핵심 단어 ‘내려가라’가 반복된다. 여섯 절에 여섯 번, 그만큼 다윗이 초조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아가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오직 전우들, 왕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는다. 첫날 내려보내는 데 실패한 다윗은 다음 날도 또 작전을 펼친다.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다. 취하면 부인 생각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우리아는 집으로 가지 않고 야영을 한다(11절).
단호한 우리아! 진짜 군인이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거룩한 전쟁’! 그렇다면 성결해야 하는 법, 왕의 기대와 달리 우리아는 오직 전쟁만 생각한다. 사실 그는 유대인도 아니다. 헷 족속, 이방인이다. 그런데 신실하다. 욕망의 화신이 된 다윗과 너무 대조적이다. 성실한 우리아와 놀고(?) 있는 다윗, 그가 자기 아내를 빼앗았는데, 우리아는 그 다윗을 위해 싸운다.
충격이다. 다윗답지 않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우리아로 인해 절대 권력 다윗이 안절부절못한다. 애가 탄다. 결국 이틀째 작전에 실패한 다윗은 이제 우리아를 죽이기로 작전을 바꾼다(14-15절). 심복 요압에게 우리아를 최전선에 배치하고 고립되게 해서 죽게 하라고 명령한다. 계속 완전 범죄를 생각한 거다. 기가 막힌 것은 우리아가 자신의 사형선고문이 담긴 편지를 자기 손으로 요압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요압도 문제의 인물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잔인한 명령을 그대로 집행한다. 문의도 없고, 항의도 없다.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악은 저항해야 하는데, 다윗의 지시대로 우리아를 죽게 한다. 전사로 꾸민 살인, 왕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을까? 아니다. 이는 분명 다윗의 살인 교사다. 우리아만 죽는 것도 아니고, 이름도 없이 군사 몇 명도 같이 죽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17절).
그런데 명령을 집행한 후 요압의 보고가 재미있다. 왕이 요압의 전술이 잘못되었다고 역으로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왕의 꼬리 자르기까지 염두에 두고 전령에게 결정적인 보고를 하게 한다. “성읍 가까이 가서 싸우라”(21절)는 왕의 명령에 따라 “가까이 가서 싸우다가 성 위에서 쏜 활에 부하 몇 사람과 함께 우리아도 죽었다”(24절)는 거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증거물로 왕의 지령이 적힌 편지도 보관하고 있었을 것 같다.
한편 전령의 전달은 지시와 또 다르다. 아예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부터 먼저 전한다(24절). 전령의 보고는 ‘왕의 종 우리아’, 마치 “지시대로 잘 죽였습니다”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모두가 다 알고 있고 다윗만 다른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믿는 벌거숭이 임금 같다.
성경의 평가가 무섭다
마태복음에 보면 성경의 평가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계보를 보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라는 표현이 나온다. 성경은 이 계보에 다말이나 룻 등 이방 여인들의 이름까지 넣었지만, 밧세바의 이름은 넣지 않았다. 그저 ‘우리아의 아내’, 남의 아내를 통해 아이를 낳았다는 불륜을 대대로 이어지는 족보에 남긴 거다. 마치 영광스러운 다윗 왕가가 형편없는 계보를 잇고 있다고 의도적으로 다윗의 영광에 먹칠한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윗은 한낱 파렴치한 인간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은 것, 밧세바 입장에서는 완전 무시당한 느낌 아닐까? 본문도 마찬가지다. 요즘으로 보면 밧세바는 성폭력 피해자일 수 있다. 남편도 살해당했다. 그런데 밧세바의 입장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오직 다윗 얘기만 나오고, 다윗의 악행 과정에 많은 남자들이 등장할 뿐, 정작 희생자인 밧세바는 말이 없다. 굳이 말을 했다면 딱 한 마디였다. “내가 임신하였나이다”(5절). 그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 다윗 왕에게 전한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마저 성폭력 피해 여성을 무시한 것일까? 성경도 가부장적인 책일까? 미투할 만한 상황, 남성 다윗 왕의 권력 놀음에 여성 피해자 밧세바는 마치 침묵을 강요당한 것 같다. 아니면 진짜 왕을 유혹하고 같이 즐긴 것일까? 말이 없다. 하지만 성경의 이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같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울 때의 기록도 그렇다.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26절) 끝까지 밧세바의 이름은 없다. 밧세바가 다윗의 여자가 아니라는 점만 강조된 것, 성경은 줄곧 다윗의 죄악을 폭로하고 저항하고 있다.
장례를 마친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자기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불륜의 자식을 낳는다. 솔로몬이 아니다. 하나님이 쳐서 병으로 죽은 아들, 그 아들을 낳은 자체가 좀 의외다. 마치 불륜을 온 천하에 폭로한 꼴 같다. 뒷정리를 한 것일까? 밧세바를 죽이거나 협박하는 선에서 끝내지 않고, 없던 일로 하지도 않았다. 밧세바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잘못은 했지만 자신이 망친 여인을 거두어들인 것일까? 반대로 밧세바가 다 폭로하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임진 것일까? 나중에 늙은 다윗을 설득하여 자기 아들 솔로몬을 왕위에 세운 것을 보면 밧세바도 보통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하튼 밧세바와 관련한 다윗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냉정하다.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다윗의 이 엄청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조는 지속된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르다고 큰소리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 아닌가? 실수투성이, 실패자!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