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아름다움

[신간] 그 자리에서
도서 「그 자리에서」

"잘 가던 사람이 멈출 때가 있고 빠르게 걷던 자가 느리게 걸을 때가 있으며 뛰던 인생이 눕게 될 때도 있다. 변주의 시간은 모두에게 반드시 한번은 찾아온다."

인생의 갑작스러운 멈춤과 깊은 절망 앞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신간 『그 자리에서』는 책상머리에서 쓰인 매끄러운 신학서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뇌전증’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채, 발작과 조롱,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캄캄한 터널을 온몸으로 통과해 낸 저자의 처절하고도 눈부신 생존기이자 신앙 고백이다.

의심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통과해 낸’ 믿음

고통 속에서 피어난 신앙 서적들은 흔히 고난을 빠르게 축복으로 미화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의심을 결코 포장하지 않는다.

감사 기도가 위선처럼 느껴지던 순간, 하나님의 침묵이 무능력함으로 다가와 숨이 막히던 시간들을 그는 날것 그대로 고백한다. 저자는 “믿음은 의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정직함. 그렇기에 그가 마침내 도달한 “괴로워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답이다”라는 고백은 그 어떤 간증보다 묵직한 진실의 무게로 독자의 가슴을 친다.

관념이 아닌 ‘일상’으로 살아내는 구체적인 영성

『그 자리에서』에 담긴 묵상들은 시처럼 압축되어 있으며, 매 꼭지의 끝에는 어김없이 말씀이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 한 편씩 천천히 곱씹기 좋아 개인 경건의 시간(QT)이나 소그룹 나눔 교재로도 훌륭하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그의 묵상이 사변적인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록 신호등은 걷고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말씀은 우리를 걷게 할 것이다. 빨강 신호등은 멈추게 하는 것처럼 예배는 우리를 멈춰 하나님께 집중하게 할 것이다."

약을 먹으며 올리는 짧은 기도, 매일의 식단과 운동을 관리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신앙을 끌어내린다. 화려한 기적이 없어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투박한 일상이 하나님께 디자인된 가장 강렬한 인생임을 증명해 낸다.

벼랑 끝에 선 이들에게 내미는 가장 정직한 손길

무엇보다 이 책의 시선은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있다. 원치 않는 질병으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 상처받아 어둠 속에 숨어버린 이들, 나아가 삶의 끈을 놓으려 고민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다가간다.

섣부른 위로나 뜬구름 잡는 긍정의 메시지가 아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차가운 바닥, 같은 고통을 먼저 겪어본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진짜 위로’다. 오늘 하루도 버텨내기 버거운 이들에게, 이 책은 당신이 쓰러진 바로 ‘그 자리에서’ 뜻밖의 생명과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먹먹하고도 든든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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