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모 시해의 비극과 아관파천, 흔들린 조선의 운명
자주독립을 향한 열망과 대내외적 갈등 커져
청일전쟁 이후 조선 내정을 장악한 일본에 반일운동을 이끈 사람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가 러시아 공사 웨베르 등 각국 공사의 도움을 요청하며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나서자 일본 외무성은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발령해서 명성황후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1895년 9월 1일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는 9월 17일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10월 8일 명성황후를 살해하기로 작정했다. 이날 새벽 2시 일본 경성수비대 제2대대가 대궐 측생문 앞에 집결하였고, 5시 30분 폭도들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담장을 넘어 빗장을 풀고 황궁 경비대와 총격전을 벌여서 연대장 홍계훈 일행이 전사하고 나머지 경비대는 도주하였다.
폭도 중 한 무리가 고종의 숙소 곤녕전으로 가서 고종의 어깨를 눌러 앉혔고 왕세자(이척, 순종)의 머리채를 잡고 칼등으로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미우라 고로는 직접 폭도들을 이끌고 건청궁 안의 곤녕합, 황후의 침전 옥호루에서 도망치는 명성황후의 머리채를 잡아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두 팔을 벌리고 황후 앞을 막아선 궁내부대신 이경직은 양팔이 잘려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서 죽었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군홧발로 걷어차고 일본도로 수차례 내려치며 난도질을 해서 죽였다. 그리고 흔적을 없앤다고 시신에 석유를 끼얹고 건청궁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웠다.
일제는 조선의 안방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지만 조선은 일제를 물리칠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가 궁궐을 탈출하였다고 거짓말을 퍼뜨리고 고종을 협박하여 황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한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민간에서는 황후가 충주에 숨었다, 진주 옥천암에 있다고 했다.
당시 농상공부대신 정병하와 군무 대신 조희연 등은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고, 이들은 명성황후를 폐하여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데 앞장서며 간택령을 내렸다. 그리고 친러파를 축출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용했으며 정병하가 고종의 상투를 자르고 유길준은 세자의 상투를 자르며 궁궐에서 삭발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황후 시해 다음 날,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면서 체면도 없이 한없이 울고 있었다. 또 독살의 위험으로 침식조차 안심이 되지 못해서 당시 선교사들이 매일 밤 두, 세 사람씩 당번을 정해서 고종을 지키기를 7주 동안 계속하였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궁녀들의 가마를 타고 가까스로 대궐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약 1년간 궁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하게 된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친일파 대신들을 모두 파면하고 친러파를 세웠다. 러시아가 일본에 먹히는 조선에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주게 된 것이다.
이때 친일파인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이 죽임을 당하고 김윤식은 제주도에 귀양을 보내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치고 대원군은 운현궁에 연금되었다.
한편, 을미사변 후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이라고 하고 대한제국의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고종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고종은 김병시, 정범조 등의 온건 개혁파를 등용하여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주력했다. 1894년 4월 7일 순한글 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7월에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독립협회는 1898년 12월까지 30개월간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단체로 활약했다.
서재필의 제의로 독립문을 세우는데 1896년 11월부터 1897년 11월 20일까지 45×30cm의 화강암 1,850개를 만들어서 완공했다. 독립문에는 당시 세계열강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서 반석 위에 세운다는 온 국민의 염원을 담은 글이 태극기 문양과 함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런데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과 이상재, 남궁억 등이 일본의 조종으로 고종황제를 폐위하고 근대국가를 세운다고 대통령에 박정양을, 부통령에 윤치호, 그리고 각부 장관에 독립협회 임원들을 임명하는 조직을 발표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에 고종은 대노하고 독립협회 임원 17명을 구속하고 아예 독립협회를 해체해 버렸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