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은총’, ‘그리스도’, ‘신앙’. 교회 안에서 흔히 쓰이는 익숙한 단어들이지만, 우리의 실제 삶과 유리된 채 허공을 맴도는 공허한 언어로 느껴진 적은 없는가?
평생에 걸쳐 신학과 삶의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자 치열하게 분투했던 구약학의 거장 월터 브루그만의 마지막 대담집, 『월터 브루그만의 고백』이 출간되었다. 그는 단순한 학자를 넘어, “오늘의 교회와 세계에서 성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묵직한 물음을 던지며 교회를 일깨우던 현대의 예언자였다.
오랜 제자이자 동료와 나눈 내밀하고 따뜻한 고백록
이 책은 브루그만이 그의 오랜 제자이자 목회자인 클로버 로이터 빌과 수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엮은 것이다. 두 사람의 깊은 우정과 신뢰 덕분에, 브루그만은 그동안의 학술적 저술에서는 쉽게 꺼내지 못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솔직하고 따뜻하게 털어놓는다.
소명의 뿌리부터 성서 해석의 원칙, 삼위일체, 안식일, 돈과 소유, 이웃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평생 천착해 온 신학적 주제들을 종횡무진 아우른다. 이 대담은 딱딱한 교리 서적이 아니라 브루그만이라는 방대하고 깊은 세계로 진입하는 가장 친절하고 매력적인 안내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대본 밖의 하나님? 하나님은 성서라는 대본을 따라 움직이신다”
브루그만은 이 책에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핵심적인 질문들에 정면으로 답한다. 그의 답변은 언제나 ‘성서 본문’으로 향한다. 시편의 탄원, 호세아의 격정, 루가복음의 비유가 과거의 낡은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향해 살아 꿈틀거리며 말을 거는 ‘현재적 사건’임을 입증한다.
“제가 보기에 하느님은 ‘대본을 따라(on script)’ 움직이십니다. 성서라는 대본이야말로 하느님의 본성에 맞는 거처입니다.”
성서 밖에서 막연히 하나님을 찾으려는 태도를 꼬집으며, 브루그만은 베토벤의 악보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가 성서라는 대본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자유를 끊임없이 새롭게 재연해 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생산성의 셈법을 내려놓고 ‘나날의 충만함’을 향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은 생의 황혼녘에 선 노학자의 가슴 뭉클한 유언과도 같다. 그는 생산성과 성취만을 쫓는 세상의 셈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이는 ‘나날의 충만함’과 ‘하느님의 셈법’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낸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굽실거리는 태도를 거부하고, 정직하고 격렬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신다.”
이 책은 교회가 지배 문화의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대안 세계를 선포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꿈꾸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선사한다. 성서를 진지하게 읽고 싶지만 막막했던 이들,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치열하게 씨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월터 브루그만이 남긴 이 값진 고백은 깊은 위로와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