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흥미롭다. 어릴 때 부끄러움 감수성이 뛰어났던 주인공은 세 번씩 결혼했다. 세 번씩 결혼했으나 행복하지 못했고 부끄러움 세포도 죽었다. 질펀한 삶의 자리에서 그냥저냥 살던 그녀가 일본어를 배우며 부끄러움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잣집으로 시집간 친구와 남편의 권유로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다. 내심 다시 이혼하면 자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시작했는데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일본말이 들렸다. 일본 관광객 가이드가 “자 여러분, 이 근처부터 소매치기에 주의하십시오”라는 일본말이 들린 것이다.
일본어가 들리고 가이드의 말을 알아들으면서 깜짝 놀라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일본 사람들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부끄러운 현실을 직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학, 영어 일본어 학원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학원이 생각났다. 부끄러움 학원! 정말 배워야 할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도시 곳곳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간판을 세우고 부끄러움을 가르치고 싶다는 주인공의 충동을 전하며 소설은 끝난다. 작가는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에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태를 질타한다. 부끄러움을 모른 채 거칠게 살던 소설의 주인공이 부끄러움 감수성을 회복하듯 우리도 부끄러움 감수성이 회복하면 좋겠다. 각성한 그녀의 부끄러움 감수성이 부럽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부끄러움을 잃은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국 사회의 상징적인 집단이 정치권이다. 정치권은 정말 몰상식하고 뻔뻔한 집단이다. 지적된 잘못을 쿨하게 인정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내로남불이나 적반하장은 정치권에는 너무 싱거운 표현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고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없다. 모두 너무너무 뻔뻔하다.
이점에 있어서 한국교회도 한국 정치권에 뒤지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부끄러움을 잊었다. 담임 목사직을 세습해도, 수십억의 은퇴 예우금을 받아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남부끄러운 파행과 악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도 부끄러움이 없다. 자성도 회개도 보이지 않는다. 자성이나 회개가 성경과 신학 교과서에서 걸어 나오지 못한다.
어느 조그마한 교단 이야기다. 교단법에 따르면 목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 총회장을 하겠다고 나섰단다. 이혼도 했고 목회하는 교회도 분명치 않다. 서류상 교회로 등록한 소위 페이퍼 처치 담임 목사라는 비난이 있다. 목사라는 이름의 무게도 감당키 어려워 보이는데 총회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또 총회장에 출마하려는데 당회가 없자 자기 아내를 장로로 세운 목사도 있다. 이렇게라도 감투를 써야 할까? 더 찌질하고 못나 보인다.
교단 총회장을 하면서 교단이 운영하는 대학에 자녀를 취직시킨 남부끄러운 얘기도 듣는다. 아버지 권력 덕분에 먹고 살 일이 열린 아들딸은 과연 괜찮을까? 아버지 영향력으로 목사가 되고 직원이 되고 교수가 되어도 양심의 가책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면 구제 불능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평생의 고통이요 저주이리라. 이들에게 총회장이 감투일까? 섬김의 자리일까?
이런 파행들을 당사자는 물론 주변이 큰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안타깝다. 부끄러움은 인간의 기본 덕목이다. 맹자는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수(羞)와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오(惡)의 마음, 즉 수오지심을 도덕의 출발이라고 보았다. 동방예의지국이라 일컫는 우리나라에 이런 도덕적 기초가 여전히 있을까? 한국교회에 수오지심이 있을까?
‘우리에게도 부끄러움 학원이 필요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교우들이 교회 앞에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 것 같아서 걱정이다. 질펀한 삶의 자리에서 화들짝 깨어나 부끄러움을 각성한 여인처럼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부끄러움을 각성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부끄러움 세포가 살아나고, 한국교회의 부끄러움 감수성이 회복됐으면 좋겠다.
#강태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