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수잔 메인즈의 기고글인 ‘거짓 예언 앞에서 피해야 할 세 가지 태도'(3 unhelpful responses to false prophecy)를 5월 14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수잔 메인즈는 공인 성경상담가이자 저자이며 미국에서 선도적인 의료비 나눔 사역 단체 중 하나인 사마리탄 미니스트리 인터내셔널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교회는 지도자들의 삶 속에 감춰져 있던 죄악들이 끊임없이 폭로되면서 큰 충격에 휩싸여 있다. 그들의 탐욕, 성적 타락, 학대 행위, 그리고 과도한 인정 욕구는 많은 이들을 지치고 경계하게 만들었다.
은사주의(charismatic) 진영의 문제 목록에는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빗나간 "예언"들마저 포함되어 있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해 은사지속론자들조차 몸을 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분명히 해두자면, '은사지속론자(더 흔하게는 은사주의자)'란 예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포함하여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고 믿는 이들을 말한다. 반면, 사도시대 이후로 성령께서 영적 은사를 주시는 일이 중단되었다고 믿는 이들은 '은사중지론자'라 부른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룬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셨고(마태복음 24:11, 24),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다(요한일서 4:1). 베드로와 바울 역시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 거짓 사도들에 대해 경고했으며(고린도후서 11:13; 베드로후서 2:1), 그들의 모든 경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영적 은사, 특히 '예언'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어서 오늘날 그 추는 반대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버렸다.
스캔들과 좌절감이 낳은 여파 속에서, 거짓 예언에 대해 '과도하게 교정하려는' 반응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반응들 모두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숙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세 가지가 그 대표적인 예다.
1. “실패한 예언은 곧 거짓 선지자라는 증거다.”
신명기 18장 18-22절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간략히 22절만 살펴보자.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그들의 말이 성취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것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짓 예언을 다루기 위해 모세오경의 특정 구절을 떼어내어 적용하기 전에,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중대한 차이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주로 죄,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리고 언약적 신실함으로 돌아와야 할 백성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령은 특정 시기에 특정 개인들에게 임하여, 주로 왕들을 향한 경고나 메시아적 약속 같은 미래의 축복을 예언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 아래 살았고, 선지자들의 말에 철저히 순종해야만 했다.
반면 신약의 초점은 은혜와 긍휼에 있다. 성령은 모든 신자 안에 항상 내주하신다. 신약에서 예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주는(덕을 세우는) 데 있다.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예언을 분별하고 평가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언약 사이에는 이처럼 거대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예언의 본질에까지 확장된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신자들을 향해 '거짓 선지자'라 낙인찍는 곳은 없으며, 예언이 부정확했다고 해서 처벌하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다. 신약에서 '거짓 선지자'라는 용어는 성육신과 기독교 신앙의 기본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진리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진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잘못된 예언을 했다고 해서 진실한 신자들이 곧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어떤 예언적 발언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다.ㅊ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2절은 이렇게 권면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이 예언의 남용에 맞서는 성경적인 해독제이지, 예언 자체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것이 답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언하는 자들을 마치 구약의 선지자처럼 대하며, 그들의 예언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혼란과 고통, 심지어 신앙의 상실까지 초래되고 있다.
2. “성경은 거짓 선지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신명기 13장 1-5절에서 가져온 주장이다. 1-3절 상반절과 5절은 다음과 같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때로는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도 정확한 예언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반역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장 극악한 죄는 '부정확함'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우상숭배로 꾀어낸 것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의 부정적인 성품에는 타락, 간음, 기만, 탐욕 등 수많은 악행이 포함되어 있었다(렘 23:11, 14; 14:13-16; 미 3:11).
우상숭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모욕이 되는 행위다. 하나님의 대언자라 자처하는 이들의 삶을 평가할 때 보아야 할 열매는 '카리스마(은사)'가 아니라 '성품'이다.
이러한 진리들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신명기에 규정된 처벌은 모세 율법의 일환이다. 이는 신약 교회 생활에 적용되지 않았으며, 오늘날 거짓 선지자들을 다루기 위한 "성경적 명령"이라고 암시해서도 안 된다.
3. “예언이 여전히 일어나긴 하지만, 이를 ‘규범적(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 부분은 필자와 같은 은사지속론자들을 향한 당부다. 바울에게 있어 영적인 은사가 역사하지 않는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언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린도전서 14:1, 3). 모든 영적 은사 중에서도 예언은 단연코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예언은 은사 중 가장 많이 언급되고, 설명되며, 장려된다.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며, 성령께서 가장 많이 사용하시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언은 신자들이 고난을 견뎌내도록 돕는다. 또한 성경을 넘어서는(그러나 성경과 충돌하지 않는) 구체적인 방향과 인도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심을 깨닫게 해준다.
그런데 대체 왜 예언이 규범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힘과 격려, 위로가 필요 없다는 뜻인가? 오늘날 결정을 내릴 때 명확한 방향성이 필요하지 않은가? 성도들이 서로를 통해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아주 가끔씩만 듣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더 유익하단 말인가?
바꿔 말해, 예언이 규범적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면 긍휼이나 가르침, 혹은 구제(관대함)의 은사 역시 "규범적"인 것으로 여겨져선 안 되는가? (로마서 12:4-8과 고린도전서 12:7-11 참조) 성경 말씀이 은사들을 임의로 나누지 않는데, 우리가 마음대로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언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부분이다. 물론 예언은 강력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은사 자체를 소외시키거나, 거짓 선지자들에게 구약의 잣대를 들이대는 방식은 곤란하다.
오히려 새 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로서, 우리는 누가 예언을 하든 공동체 안에서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그 예언을 시험해야 할 책임이 있다. 또한, 교회가 이 문제를 올바르게 정립해야 할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기에 이제는 제대로 마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