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위르겐 몰트만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논평

오피니언·칼럼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명예교수, 기독교학술원장)
‘위르겐 몰트만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명예교수)가 논평을 전하고 있다. ©한국신학아카데미 제공

※ 한국신학아카데미(원장 김균진 박사)는 8일 오후 서울 안암동 세미나실에서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교수의 삶과 신학’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아래 글은 이날 세미나에서 김영한 박사가 발표한 논평문입니다-편집자 주

종말론적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의 공헌과 남은 문제 - 격변과 고통의 시대에 희망 신앙, 성경의 종말론에 배치되는 만유구원론 제시

머리말

독일의 희망 신학자 몰트만(1926-2024, Jürgen Moltmann) 탄생 백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이룬 신학적 공헌 및 남긴 문제들을 성찰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1960년대 바르트가 하나님 계시를 원역사(Urgeschichte)로, 불트만이 실존(Existenz) 차원으로 축소시킨 계시의 역사 부재 시대에 몰트만은 약속과 성취의 말씀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적 희망(eschatologische Hoffnung) 을 주제화하였다.

그의 신학은 당시 1960년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사회변혁 가운데서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짓눌린 자들을 위한 혁명신학, 1970년대 한국에서 일어난 민중신학의 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공헌을 하였다. 그의 희망신학은 당시 주도했던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의 마르크스적 유토피아 사회혁명 사상에 대항하여 미래에서 오시는 하나님의 기독교적 희망의 온건한 사회변혁의 동력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독일유학 온 한국인 학생들을 보살피고 가르쳐 학문적 제자들(9명)로 배출했고,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하고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큰 영향을 준 해외학자 가운데 한 분일 것이다. 몰트만 신학 유산을 기념하는 발표에 있어서 그의 저서들 개관을 통한 김명용의 포괄적인 평가에 대해서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 몰트만의 공헌 및 남은 문제를 성찰해본다.

I. 종말론적 희망을 주제화

몰트만은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초월적 주체성’(칼 바르트)이나 ‘인간의 초월적 주체성’(루돌프 불트만), ‘구속선으로서 점진적 계시’(오스카 쿨만)나 ‘보편적 역사’(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를 통해서가 아니라 약속과 성취의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보았다. 그것은 소망의 성격을 갖는다. 세기적 저서라고 할 수 있는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 1964)의 공헌은 변혁과 혼란 가운데서 새 시대를 만들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을 주제로한 종말론의 역사적 해석으로 종말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희망의 신학』은 무신론적 희망을 제시한 철학자 블로흐의 『희망 원리』((Prinzip Hoffnung, 1960)에 대하여 기독교적 소망을 제시한 기독교 변증서였다. 몰트만은 블로흐와 다른 그 자신의 희망 착상을 천명하였다: “블로흐는 초월성이 없이 초월하고, 나는 초월성을 지니고 초월한다. 블로흐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희망하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희망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화를 선언하면서 “역사의 미래에 건설될 하나님 나라가 성경의 핵심 메시지”라고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가 스스로 만드는 미래가 아니다. 희망의 신학은 종말론적 희망과 역사적 실천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루었다.

1960년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 독재(獨裁)체제에 대한 투쟁으로서 내세적 하나님 나라보다 역사와 사회변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 강조는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가르치는바 개인과 신앙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약화 내지 도외시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의 기대와 신앙을 충족시키는데 미흡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하늘로부터 강림하는 나라라는 몰트만의 강조는 그의 종말론이 초월성 없는 내재적 종말론이라는 일부 경건주의자들의 비난을 잠재우기에 충분하다.

II. 십자가 신학: 항의 무신론 반박 및 만유회복론 근거로 해석.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 1972)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호르커하이머(Max Horkerheimer, 1895-1973)가 제시한 항의무신론(Protestatheismus)에 대한 응답으로서 십자가 신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몰트만은 세상의 불의와 재난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와 선함을 회의하는 항의무신론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고난과 하나님의 무능을 발견했고, 인간과 같이 목마르고 죽어가는 하나님”을 증언했으며 “세상의 고난 한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증언했다. 몰트만은 세상 역사 한 가운데 십자가가 서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통하여 항의무신론에 대하여 응답하고, 보편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판넨베르그의 보편사신학적 견해를 거부했다. 몰트만은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속에 계신다고 선언했다.

십자가 신학의 이러한 긍정적 차원에도 불구하고 만유화해론의 여지를 신학적 문제로 남겼다. 그것은 몰트만이 “십자가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유일한 실제적 귀결은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 이라고 선언한 것에서 비롯된다. 종교개혁신학자들은 몰트만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만유회복론의 근거로 해석함으로써 십자가 신학은 루터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보편화해론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본다.

III.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군주적 독재구조 폐기 공헌, 삼신론 위험성 제기.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Trinität und Reich Gottes, 1980)의 공헌은 사회적(sozial) 삼위일체삼위일체론 제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 바르트(Karl Barth)와 칼 라너(Karl Rahner)의 신론은 일신론적 삼위일체 경향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삼위는 이 하나님의 존재양태(Seinsweise/Karl Barth) 혹은 실체의 양태(Subsistenzweise/Karl Rahner)리고 보았다. 몰트만은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오해“하여 양태론 이단에 근접하는 바르트와 라너의 삼위일체론을 극복하고자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군주적 독재 구조를 폐기하고, 상호 간의 사랑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신학적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하나 보다는 세 분의 연합을 강조해서, 세 분의 하나임이 도외시 되는 삼신론의 비난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

오늘날 주류 교회가 고백하는 삼위일체론은 381년 재확정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전통적 삼위일체론이다. 이는 일신론적이거나 양태론적이거나 사회적 사귐과 연합이 아니라 하나 속의 셋, 셋 속의 하나(한 동일 본질one essence이면서 세 실체적 위격three persons의 신비)라는 불가분리적 상호내재성(perichoresis)을 말한다.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 전통적 삼위일체론 재확정에는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Three Cappadocians), 즉, 가이사랴의 바질(Basil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기여가 있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니케아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우시아(ousia, 본질)'와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의 개념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의 틀을 마련했다. 즉, 하나님은 한 본질(ousia)이지만 세 위격(hypostaseis)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한 분이라고 시작부터 계셨다면 세 분은 마찬가지로 똑 같이 계셨다.” 카파도키아 세 교부는 성자의 신성이 단지 성부와의 동질이라는 단일신론(monarchianism)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가 있는 세 위격(three persons)으로서 실체실체적 존재( hypostasis)가 본질(essentia, nature)에 있어서 동일하다(homoousios)는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tia)을 제안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와의 위격적 차이를 이끌어내었다. 이것이 니케아 신경(325)이 니케아 회의 후에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박해받다가 56년 후 재확인된 니케아-콘스탄티노블 신경(381)이다.

IV. 범재신론 수용: 창조의 영을 우주의 영으로 변질? 유신진화론은 거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Gott in der Schöpfung, 1985)에서 몰트만은 생태학적 창조론 (ökologische Schöpfungslehre)을 전개하여, 하나님과 인간 및 피조물이 서로가 서로 안에 거하는 관점으로 우주 전체를 새롭게 보는 신학적 지평을 열었다. 김명용은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몰트만이 범재신론 (panentheism)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몰트만은 생태학적 창조론 안에 “일신론적 요소와 범신론적 요소를 통합“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이 세계 안에 거하시며, 꺼꾸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은 사실상 삼위일체적으로만 생각될 수 있고,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몰트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우주의 영으로 보고 역사와 우주의 사건 안에 밀착시키고 의존시킴으로써 범재신론을 수용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몰트만의 생태학적 창조론은 범재신론적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김명용은 몰트만이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을 자신의 입장이라고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고 한다. 몰트만은 자신의 관점이 계속적 창조론 (creatio continua)이라고 강력하게 피력했다고 한다. 자연의 진화 역사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의 역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몰트만의 입장은 그가 유신진화론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고 김명용은 변호한다. 하지만 그 설득력은 앞으로 몰트만의 관련 문장에 대한 보다 엄밀한 논의를 통해서만 관철될 수 있을 것이다.

V. 사회 구원과 우주적 기독론으로서의 메시아적 기독론: 전통적 영혼 구원의 기독론 거부

『예수 그리스도의 길』(Der Weg Jesu Christi, 1989)에서 몰트만은 ‘메시아적 차원의 기독론’ (Christologie in messianischen Dimensionen), 즉 우주적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말은 모든 것의 새 창조이다”

(Eschatologisch ist die Neuschöpfung aller Dinge). 라고 말한다. 그의 메시아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 영혼 구원의 메시야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모든 것을 구체적 곤경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을 천명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전통 기독교의 영혼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상(像)을 거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메시아적 기독론을 개인 영혼 구원의 메시아론이 아닌 사회 구원의 메시아론, 우주적 기독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몰트만 기독론의 정치신학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혼 구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상(像)을 거부하는 몰트만의 메시아론은 전통적 주류기독교,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개혁 전통의 예수 그리스도상(像)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러한 몰트만의 입장은 그가 루터, 칼빈, 낙스, 오웬 전통을 신봉하는 청교도 복음주의 신학 진영에서 비판받는 근거가 된다.

『생명의 영』 (Der Geist des Lebens, 1991)에서 몰트만은 온전한 성령론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을 전개한다. 성령의 구원 사역은 영혼과 육체, 인간의 개인적 차원과 더불어 사회적 역사적 차원 및 인간의 구원과 함께 전체 피조 세계의 구원을 포괄한다. 이러한 온전한 성령론은 전통적 성령론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VI. 만유회복론으로서의 종말론, 성경의 종말론에서 이탈.

『오시는 하나님』 (Das Kommen Gottes, 1995)에서 몰트만은 칼 바르트의 만유화해론 (Allversöhnungslehre)이 남긴 신학적 문제를 만유구원론(Allerlösungslehre)으로 정리하였다.

몰트만이 가능성으로 제시한 만유구원론은 엄청난 찬사와 비판을 함께 야기시켰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비대칭적 관계에 있으며, 결국은 하나님이 이기신다고 본다: ‘불신앙의 인간은 물론 구원의 은총을 거역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끝없이 지옥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종국은 만인의 구원으로 끝날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인간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신다: “영원한 죽음의 벌이 선고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마귀, 타락한 천사들이...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복음주의자인 김명용은 만유구원론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말 정당한 구원론일까 의문을 제기한다. 필자는 그의 견해에 동감한다. 이 논쟁은 21세기 최대의 신학 논쟁으로 남게 되었다. .

몰트만은 마지막 저서 『나는 영생을 믿는다』 (Auferstanden in das ewige Leben, 2020)에서 “우리는 죽는 순간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죽음의 고통은 영원한 생명으로 탄생하기 위한 고통이다. 몰트만은 피력한다: “죽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생일과 같습니다.” “생명은 변화되며, 폐기되지 않는다.”(Vita mutatur, non tollitur)
몰트만은 부활은 죽음에서 일어난다고 표명하고, 자기 묘비에 그렇게 써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몰트만은 죽음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부활은 역사의 마지막 날 부활의 선취적(Vorwegnahme) 사건이라고 주장한 칼 라너(Karl Rahner), 그레스하케(G. Greshake)와 로핑크 (G. Lohfink) 등의 주장 에 대해 비판해왔다. 하지만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는 그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고, 성도들의 죽음과 함께 선취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이 1995년의 『오시는 하나님』과 2020년의 『나는 영생을 믿는다』의 중요한 차이다.

맺음말

기후의 변화로 생태계가 신음하고, 희귀종들이 소멸해 가는 생태위기 속에 있는 지구촌, AI(인공지능)가 “특이점”(Singular Point)으로 비약시 인류를 지배한다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교차하는 가운데 오늘날 지구촌은 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란 전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적 사유를 통해서 고난 가운데 인간과 함께 하시며 미래에서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신앙을 일깨우는 공헌을 남겼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몰트만이 보여준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과 죽음과 더불어 부활한다는 부활신앙은 찬사를 받을만 하다. 하지만 몰트만이 남긴 문제는 바르트가 남긴 만유화해론을 만유구원론으로 해석하면서 성경이 예언해주는 종말론적 영생과 영벌의 이원론을 도외시하고 희망의 낙관주의(hope optimism) 틀 안에서 불신자까지 구원얻는다는 오리게네스적 만유구원론을 선언한 것이다. 만유구원(die Allerlösung) 이슈는 신학이 해야할 선언이 아니고 만유를 예지와 예정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속하지 않는가?. 신학은 단지 그것을 소망할 뿐, 성경적 종말 메시지를 전해야할 뿐이다.

진정한 신학은 지식의 선악과에 손대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결정에 따르는 겸허의 신학이다. 참 신학은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난제들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혜와 주권에 맡기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하고 하나님의 헤세드חסד를 신뢰하고 소망하는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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