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중국 마을

오피니언·칼럼
선교신문 기자
존 로스 선교사의 만주선교 방법론(6)
왕 노인의 장례에 모인 가족들 ©Old Wang 책에서

저는 1872년 우장1)에서 선교를 시작했을 때, 중국 사람들이 선교사를 매우 의심하여 화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뒤알드(Du Halde) 신부의 책을 읽어보니, 예수회 교단이 중국에서 자리를 잡은 직후에 이런 의심이 만성적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이런 의심은 중국에서 어제오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지 스타운턴(Sir George Staunton) 경(卿)은 얼 매카트니(Earl Macartney) 대사 일행의 행적에 관한 역사에서, 중국인이 선교사를 의심했다는 점과 그 이유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곳 우장에서 중국 사람들이 선교사에게 보이는 의심은 더 크고 오래된 중국 고유의 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선교사들이 중국의 평화와 자유에 어긋나는 의도를 몰래 숨기고 있다고 점점 더 확신했습니다. 장사꾼은 이득을 얻기 위해 삽니다. 의사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합니다. 영사(領事)는 외국에 있는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보살피는 대가로 높은 보수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곳에 왔을까요? 중국인들은 기독교에 관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조차 몰랐습니다.

중국인들은 보통 예수님이 ‘외국’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고 믿었습니다. 유럽이 ‘외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그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중국은 아름답고 부유하지만 ‘외국’은 가난하다고 믿었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무슨 이유로 고국 땅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왔겠냐는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예수라는 임금은 아름답고 부유한 중국 땅을 소유하기 위해 1842년에 중국에 군대를 보냈고, 1860년에도 다른 군대를 보냈다. 그 외국 군대는 승리했지만, 자신들을 반겨주는 중국인 무리가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력은 부적절하다는 사실이 두 번이나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 ‘외국’ 임금은 이제 잔꾀를 쓰기로 했습니다.

‘외국’ 나라 임금 예수는, 자신의 음모에 찬성해 줄 중국인 무리를 확보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리를 모을 목적으로 부하들을 중국에 보냈습니다. 이런 사절단이 바로 선교사들입니다. 선교사들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먹이든 감언이설로 속이든, 가르치든 마술을 부리든, 정직한 방법이든 부정한 방법이든, 불명예스럽게 조국을 등질 중국인 배신자들을 가능한 대로 많이 끌어모아야 했습니다.

이 역적 무리가 중국의 인구와 넓이에 비례하여 엄청나게 커지면, 그 ‘외국’ 임금이 자신의 군대를 중국에 다시 보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역적 무리가 모든 곳에서 그 군대를 안내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알려주고 성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보통 이런 식으로 믿기 때문에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중국인은 원칙적으로, 다른 어떤 민족보다 교육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중국인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자선 행위를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특히 그들은 앞날이 밝지만 가난해서 제힘으로 배울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 무료로 교육 수단을 제공하여 학문도 증진하고, 타인도 행복하게 하는 두 가지 선을 겸해서 하는 관대한 시민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방법을 활용하여 중국인들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 1873년에 교사 한 명을 고용하고, 우장에 학교를 세운 뒤에 전도유망한 청년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무료로 음식도 먹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학교에 오라고 초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공자의 고전만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면, 선교사들이 중국의 토착 관습을 뒤엎으려는 의향이 없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입증해 보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학교의 영향력이 소리 소문 없이 점차 인근에 퍼져나갔고, 우리는 친구 몇 명을 얻었습니다. 그 학교 덕택에 선교사에 대한 격한 적대감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리고 두어 해가 지난 뒤, 그 학교의 특성이 바뀌었습니다. 교사가 바쁠 정도로 기독교인 청소년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국 고유의 고전을 가르치는 것이 여전히 교육의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는 개교 첫해, 우장의 한 상인과 우호적 관계를 돈독히 다지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태평산’ 토박이 상인이었는데, ‘태평산’은 부두에서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마을 이름으로 ‘크고 평평한 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름 지어진 그 산은 고립된 산간 지대 몇 곳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지역인데, 화산이 활동하면서 부근의 화강암 구릉들과 동쪽의 산들을 비틀고 찢어놓은 뒤에, 서쪽 지역에서 발작을 일으키듯이 용암을 분출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상인은 자신의 고향 마을의 안타까운 처지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3년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 생활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흉년이 든 처음 두 해, 농민들은 농장의 기구를 모두 팔고,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빌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곡식을 샀습니다. 그러나 3년째 되던 해에 파괴적인 홍수가 몰려와, 무럭무럭 자라 이제 곧 이삭을 맺을 곡식 줄기들을 다 망쳐놓은 뒤에는 농민들이 더는 팔 물건도 없고 돈을 빌릴 데도 없었습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 마을 주민들은 기근으로 깊은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땅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돌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뿌리를 캐기 위해 이 얼음덩어리를 힘들게 팠습니다. 풀뿌리를 삶은 것이 그들의 유일한 음식이었고, 들판과 산에 드문드문 자라는 마른 풀들이 유일한 땔감이었습니다.

주민들 처지가 너무 안타까웠고, 성탄절이었던 만큼 도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줄 대책을 세웠습니다. 부두에 거주하는 영국인 몇 사람이 평소처럼 자발적으로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마을 주민들에게 자선의 손길을 내밀어 부두에서 곡식을 다량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 큰 집 하나를 빌린 뒤에 곡식을 그 집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왕 형제2)를 보내 일정한 조건으로 곡식을 나눠주게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곡식이 충분하지 않아 마을 사람 모두에게 적절하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들이 고용한 교사 밑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하며 그 집에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청소년의 부모에게 음식과 땔감을 공급하도록 왕 형제에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평소처럼 외국인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혀 그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외국인들의 뱃속 시커먼 음모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몇 사람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든지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차피 사는 게 말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 몇 명을 그 학교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이들을 넉넉히 먹이고 잘 돌보자,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런 아이들이 그 학교에 가득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그때 즈음 선교 헌금이 더 많이 들어와, 모든 가정이 연명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곡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봄에는 농민들에게 씨앗도 나눠주었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낯선 외국인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마을 주민을 구했다는 소문이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고, 선교사들은 사역하기가 매우 수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태평산은 우장의 사역 기지가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할 일이 없는 겨울 동안,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왕 형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소년 소녀들에게 찬송가 몇 곡을 가르쳤습니다. ‘만세 반석 열리니’, ‘예수 사랑하심은’,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같은 잘 알려진 찬송가였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전, 찬양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아침 예배에서 찬송을 두 곡 노래했고, 왕 형제와 소년들이 성경 한 장을 번갈아 읽었으며, 그런 다음에는 왕 형제가 기도했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의 중간 점심시간에 다시 찬양했고, 저녁 예배에서 두 곡을 찬양했고, 잠자리에 들 때 한 곡을 찬양했습니다. 그다음 해 가을, 저는 한 남자가 수레에 곡식을 실으면서 평범한 향토 민요 대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미주]

1) 우장(New Chwang: 현재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시의 '우장(牛莊)' 지역

2) 왕 노인은 1874년 존 로스를 만나 개종한 후, 1875년에 세례를 받은 만주 선교의 제1호 개종자로 기록되어 있다.

발췌: 존 로스 선교사의『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순교자의 소리(www.vomkorea.com), 감수: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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