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정병준)가 최근 제443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Zoom)으로 개최하고, 선교 역사와 교단 분열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역사 연구 논의를 이어갔다. 이번 학술발표회에서는 19세기 동아시아 선교사의 이동 경로와 근대 교통망의 관계, 그리고 1959년과 1961년 한국교회 주요 교단 분열을 둘러싼 국제적 흐름과 ‘NAE 논쟁’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 근대 교통망 속 선교사 이동 재조명… 동아시아 선교의 구조적 특징 분석
첫 번째 발표에 나선 이용상 시모노세키시립대학 특임교수는 ‘선교의 진전과 교통의 발전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19세기 후반 개신교 선교사들의 동아시아 진출이 근대 체제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전했다.
이 교수는 기존 선교사 연구가 주로 전기나 회고록, 교단 보고서 등에 의존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자료들은 선교사의 이동 경로와 시점, 교통수단 등에 대해 추정적인 서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히 어떤 항구에서 어떤 선박을 이용했는지, 언제 특정 지역에 도착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 1차 사료를 통한 엄밀한 고증이 부족했던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교수는 「The Japan Weekly Mail」에 기록된 항만 및 승객 자료를 분석하여, 1880년대 개신교 선교사들의 동아시아 이동이 철도와 해운, 항만으로 연결된 근대 교통 네트워크 위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제시했다.
그는 “연구에 따르면 언더우드를 비롯한 동시대 선교사들의 이동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확인된다. 이들은 정기 증기선을 활용한 표준화된 항로를 이용했으며, 가족을 동반한 이동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단기 체류가 아닌 장기 정착을 전제로 한 선교 전략을 반영한 것으로 분석된다”며 “또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고베, 나가사키, 홍콩, 상하이 등으로 이어지는 허브형 이동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은 이러한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다”고 했다.
특히 “언더우드의 일본 도착은 ‘City of New York’호의 입항 기록을 통해 날짜와 선박 단위로 구체적으로 확인되며, 이를 통해 선교사 이동이 개인적 차원이 아닌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며 “이것은 선교사를 근대 세계 교통체계 속을 이동한 글로벌 행위자로 재위치시키는 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또한 “일본은 한국 선교에 있어 지리적으로 인접한 거점으로서 선교사 이동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으며, 중국 상하이와 홍콩 역시 주요 경로로 기능했다”고 덧붙였다.
◆ 한국교회 분열과 ‘NAE 논쟁’ 재해석… 국제 복음주의 흐름 속 의미 조명
이어 두 번째 발표에서 정헌태 연세대학교 박사는 ‘한국의 장로교·성결교 분열에 대한 미국 NAE의 반응 연구(1959~1961)’를 주제로 발제했다. 정 박사는 “1959년과 1961년에 발생한 장로교와 성결교의 분열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찬반 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로교의 경우, 각 입장을 대변하는 세력은 ‘NAE파’와 ‘에큐메니컬파’로 구분되었다. 반면 성결교 내부에서는 ‘NAE파’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으나, 외부에서는 장로교의 대립 구도를 기준으로 성결교 갈등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며 “두 교단 모두 갈등의 중심에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장로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가, 성결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고 덧붙였다.
정 박사는 또한 “당시 교계 언론과 후대 연구자들이 교단 분열의 배경에 신학적 문제뿐 아니라 교권과 이권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석하고 있다”며 “이처럼 1959년부터 1961년까지의 시기는 신학적 갈등과 교권 다툼이 얽힌 혼란의 시기였으며, 그 이면에는 ‘NAE’라는 용어를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NAE’는 미국의 초교파 복음주의 연합단체인 ‘전국복음주의자협회’를 의미하지만, 한국에서도 유사한 명칭이 사용되면서 혼선이 발생했다”며 “한국의 초교파 복음주의 연합단체는 스스로를 ‘한국 NAE’라고 불렀으며, 특정 교단 내 세력 또한 ‘NAE파’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한국 NAE와 미국 NAE 간의 관계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조직적 종속 관계로 추정되기도 했다”고 했다.
정 박사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한국 NAE는 미국 NAE의 지부가 아니라 세계복음주의연맹(WEF)에 속한 독립적인 한국 복음주의 연합체였다”며 “실제로 한국 NAE는 1960년 ‘KEF’로 명칭을 변경하며 독자적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했다.
또 “당시 한국교계에서 ‘NAE’라는 용어는 진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반-에큐메니컬 진영은 스스로를 ‘NAE파’로 지칭하며 미국 단체와의 연계를 강조했고, 반대 진영은 이를 교권 세력이나 이익집단으로 규정하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며 “이 과정에서 ‘NAE’는 점차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이미지가 한국 NAE 전체에까지 확장되었다는 분석이 제시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 NAE가 본래 초교파 연합단체였다는 사실이 간과되었다”며 “한국교회 담론에서 ‘NAE’에 덧씌워진 부정적 인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 박사는 “1959년 장로교 분열 당시 에큐메니컬 진영과 반-에큐메니컬 진영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지만, 초기에는 두 진영 모두 넓은 의미의 에큐메니컬 범주 안에서 이해되기도 했다”며 마펫(마삼락)이 저술한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세계교회협의회뿐 아니라 세계복음주의연맹까지 포함하여 설명한 점을 언급하며 “에큐메니컬 운동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누는 기존 인식에 재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울러 “결국 당시의 갈등을 단순한 찬반 대립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에큐메니컬 진영들의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