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서 믿는 자들을 향해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노골적인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잘못 이해한 신앙에 대한 경고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은혜로 누리기보다, 안전장치처럼 이용하고 있음을 꿰뚫어 본다. 심판이 더디게 오는 이유를 회개의 기회로 보지 않고, 죄를 반복해도 괜찮다는 근거로 삼는 태도를 바울은 이것을 멸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 그리고 길이 참으심은 인간을 방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회개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방식이다. 하나님이 즉각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죄를 가볍게 여기시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오래 참으심을 오해한다. “하나님은 결국 용서하실 테니”라는 생각은, 회개의 문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자가 아니라 죄를 지속하게 하는 핑계로 전락한다.
바울은 이 지점에서 믿는 자 안에 있는 더 깊은 불경건을 드러낸다. 이방인의 불경건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는 데 있다면, 신앙인의 불경건은 하나님의 자비를 계산하며 사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값싼 은혜로 만들고, 회개 없는 확신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신앙의 모양을 가졌으나 그 능력을 잃은 모습이다.
5절에서 바울은 그 결과를 분명히 말한다. 회개하지 않는 고집은 중립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노를 ‘쌓는’ 행위다. 죄가 반복될수록, 그리고 회개의 기회가 거절될수록, 심판의 날을 향한 무게는 더해진다. 하나님의 진노는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감정이 아니라, 끝내 돌이키지 않는 마음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공의의 결과다.
바울이 경고하는 고집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고치지 않겠다는 불순종의 선언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가장 위험한 신앙의 징후다.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했지만, 바리새인은 자신을 돌아볼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로 이어질 때 은혜가 되지만, 고집과 결합될 때 그것은 심판을 앞당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것을 회개의 초대로 듣고 있는가, 아니면 죄를 지속할 수 있는 여유로 오해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사랑은 회개를 요구하는 사랑이며, 고집을 꺾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부르는 사랑이다. 인자를 멸시하지 말고, 오늘 주어진 은혜의 시간을 붙드는 것, 그것이 진노의 날을 준비하는 참된 신앙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