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전면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두 사람이 아니라 사실상 그들을 배후에서 인도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래서 신약학자 페린(Norman Perrin)은 누가복음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사도행전을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한 바 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했다. 성령의 능력이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복음 증거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었다.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바뀐다. 다시 일어나 걸은 것도 놀랍지만, 그 발로 하나님 성전에 들어간 것이 더 소중하다. 병에서 고침을 받았는데, 그 발로 술집이나 도박장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자로 살라고 고쳐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원준 – 톡톡 사도행전
하나님의 참사람의 창조 의미는 단순히 외형상 나타나는 생물학적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근원적 심정을 담을 수 있는 내면적 특성을 가진 참사람의 완성에 두었던 것이기에, 진화론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 이론으로 인류 탄생의 이론을 파헤치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간과 사람의 차이’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 화려한 물질문명의 풍요로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고 하여도 결국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 심정과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내 체형에 맞지 않은 남의 옷을 입은 형상과도 같다. 실체를 갖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고귀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 존재들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룰 인간 창조를 위해 그 오랜 시간 동안 관찰하고 고심하며, 어느 때는 자신의 힘으로 어렵게 창조한 생명들을 지워야만 했던 아픔을 거쳤다. 그렇게 창조된 사람이 한갓 헛된 허울 덩어리에 귀속되어 자신의 뜻에 저버리는 행위를 일삼는 인간들을 보고 있을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삿된 행동은 금해야 한다.
강재수 - 참사랑의 귀향
참된 구원은 인간의 특정 사상이나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역사적 개입, 곧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과 은혜로 이뤄진다. 이 복음을 접하게 되기까지 사람들이 신봉한 여러 종교에서도 도덕적 책임, 자기 초월의 추구, 절대자에 대한 경외와 같은 긍정적 가치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가치들은 각 종교의 독자적 진리라기보다 하나님이 자연세계와 양심에 심어두신 일반계시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여러 종교에 속한 다양한 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세계와 양심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은 그들의 가치관과 영적 갈망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에 공감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해주는 유의미한 접촉점이 된다.
안환균 - 예수 몰랐던 세종 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천국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