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를 배출한 오래된 교정에 서다”
“동방의 끝자락 조선에 복음과 병원, 교회를 세운 선교사”
“애국의 열정은 지금도 여전히 후손들의 가슴에 흐른다”
국난과 민족적인 시련이 있을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내었다. 그러한 역사가 깃든 충절의 고장, 한국교회사에서 잊을 수 없는 충남 공주시 기독교박물관에 다녀왔다.
인근에 있는 영명중,고등학교 역사박물관과 기독교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를 배출한 오래된 교정 곳곳에는 역사의 흔적을 증명하듯 동문들의 동상들이 있었다. 영명동산에서 한 눈에 바라본 공주의 시내는 최고의 장관이었다.
학교 뒷동산에 있는 우리암 선교사와 우광복 선교사 묘소를 찾았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아이들의 무덤을 찾아 그들의 신앙 유산을 기억하면서 고국을 떠나 동방의 끝자락 조선에 복음과 병원, 교회를 세워주신 선교사들에게 늦었지만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다.
3.1독립운동과 복음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공주지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1885년 미국 감리회는 조선에 첫 선교사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공주는 1898년 스크랜튼 선교사의 방문으로 한강이남 충청지역 선교의 요충지 및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1901년 7월 공주지역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 초가 한 동의 교회를 시작으로 1903년 7월 하리동교회, 1909년 5월 협산자 예배당, 1931년 11월 상반정 공주읍교회를 개척했다. 공주지역 감리회와 공주제일교회는 원활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공주읍내에 영명학교와 공주유치원, 방은두병원 등을 설립하여 대사회적인 선교를 펼쳐갔다.
뿐만 아니라, 공주지역 감리회 공동체는 공주읍내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공주지역의 청년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6.10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에도 참여했다. 특히 공주지역 감리회공동체는 각종 강연회나 야학회 등을 통하여 공주지역 신문화보급운동에 앞장섰다.
감리회공동체의 중심에는 공주제일교회가 있었다. 근대기에는 공주시 사회복지와 교육을 주도하였다. 민족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함께 견뎌낸 공주제일교회는 공주시 근, 현대사가 집약된 역사의 현장이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한 공주제일교회 구예배당과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이후 공주시에도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확산되었다. 동년 4월 1일 오후 2시 공주읍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시위는 공주읍교회(현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담임목사가 총 지휘를 하였다. 당시 공주읍교회 임원이며 영명학교 교사였던 이들과 학생 등 공주지역 감리회공동체가 주도하여 진행되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던 이 운동에서 현석칠 담임목사 외 17명의 인물들이 피검 되어 핍박을 받았다.
공주제일교회는 1900년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관장하는 수원 이남의 감리교 중심지였다. 1902년 반죽동에 초가 1동을 구입하여 김동현 전도사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03년 7월 맥길 선교사의 파송과 더불어 초가 2동으로 본격적으로 선교를 진행하였다.
당시, 50-60명에 불과하였던 교인이 1907년에 이르러 300 여명으로 성장하였다. 예배당 확장이 불가피했지만 당시 교회 안팎의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선교부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우산을 쓴 한 사람이 많은 헌금을 내놓게 되었다. 이 재원이 공주로 보내져 1909년 5월 예배당을 봉헌하게 되었다. 봉헌자의 아름다운 마음을 기리며 교인들은 이를 협산자(우산을 든 사람)예배당이라 불렀다.
이후 교회가 더욱 성장을 하여 500 여명 가량을 수용하게 되면서 오히려 예배당이 비좁아졌다. 1929년 새 예배당 건축을 계획하였고 1931년 11월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공주기독교박물관/등록문화재 472호)을 봉헌하였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은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크고 웅장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안타깝게도 6.25한국전쟁 당시 폭격에 의해 교회의 상층부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1956년 성도들의 헌신으로 예배당이 재건되었고 이 때 합산자 예배당의 건축자재를 일부 사용하였다. 모든 재건은 기술자들 외에는 다른 일꾼 없이 교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만 진행이 되었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설치하였고 출입구를 넓히는 등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어느덧 3.1운동이 일어났던 세월이 107년이 되었다. 조국의 독립과 한국교회를 향한 사랑과 애국의 열정은 지금도 여전히 후손들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다시 한 번 자유대한민국의 번영과 예수 생명을 전하는 사역에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나라가 문화와 신앙의 기둥이 든든하여 국내외 악한 세력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 전국의 교회가 무궁한 발전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세워져서 십자가 복음이 자랑스럽게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최선(崔宣) 박사(Ph.D., Th.D.)
SBCM KOREA 대표
前) ALU대학교 강사
극동방송 칼럼니스트
시인작가 전자책 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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