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기독교 시대, 그리스도인이 성장 가능성: 마음·이성·공동체로 회복하는 제자도의 길

티아고 실바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티아고 실바의 기고글인 ‘탈기독교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How do you grow as a Christian in a post-Christian age?)를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티아고 실바는 브라질의 맥켄지 장로교 대학교(Mackenzie Presbyterian University),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퓨리턴 개혁 신학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실바 박사는 루이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위치한 베델 장로교회(PCA)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동시에 C. S. 루이스 연구소 레이크찰스 지부의 시티 디렉터 그리고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서구 기독교는 지금 결정적인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한때 신앙을 지탱해 주던 문화적 구조들인 사회적 규범, 교육 제도, 심지어 법과 정치에 깔려 있던 암묵적 전제들이 무너졌다. 과거에는 교회 출석이 일반적이었고,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기독교적 도덕 틀이 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전제돼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세계는 이미 먼 과거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신앙은 무관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디지털 혁명과 세계적 다원주의 속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는 수많은 경쟁적 세계관 앞에 놓여 있다.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는 거부의 대상이기보다는, 그저 무시되는 존재가 됐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제자도의 부름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만, 동시에 심각하게 오해받고 있다. 제자도는 어떤 행사나 강좌, 프로그램이 아니다. 12주 과정의 커리큘럼도 아니고, 영적 습관의 체크리스트도 아니다. 제자도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여정이다. 이는 옛 삶의 방식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입는 부름이며, 생각과 욕망, 관계를 포함한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이 그의 은혜로 변화되도록 허용하는 삶이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말씀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것은 영적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남녀를 하나님의 사명의 한복판으로 불러들이셨다. 믿음과 순종, 변화로 규정되는 삶으로의 소명이었다. 이 여정의 중심에는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이 있다. 참된 제자도는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단순한 윤리적 외형 순응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전체를 다루며,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근본적으로 재형성한다.

문제는 분명하다. 회의주의와 무관심, 급진적 개인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시대 속에서 제자도는 어떻게 온전하고 성숙한 신자를 형성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기독교 형성의 세 가지 비전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본다. 곧 이성의 제자도, 상상력을 통한 마음의 제자도,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제자도다. 이 전인적 비전은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성의 문화적·영적 위기를 날카롭게 통찰했던 C. S. 루이스의 저작을 통해 더욱 분명히 조명된다.

이성의 제자도: 지적 깊이를 기르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신앙과 이성은 서로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세속 문화의 지배적 서사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비이성적 도약이거나 비판적 사고의 포기, 혹은 기껏해야 개인적 취향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유물론은 실험실에서 증명된 것만이 믿을 만한 진리라고 주장하고, 상대주의는 진리 자체가 유동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신무신론’은 기독교를 지적으로 낡은 것으로 몰아붙여 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준비돼 있지 않다. 성경의 일부 구절이나 몇 가지 교리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세계를 설명하는지 말하지 못한다. 대학 강의실이나 직장 대화, 심지어 식탁에서조차 회의적 질문을 받을 때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결코 이성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지혜를 얻으라, 비록 네 소유 전부를 주더라도”(잠 4:7)라는 잠언의 전통에서부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라”(고후 10:5)는 바울의 권면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부른다. 예수 자신도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막 12:30)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교회사 역시 이를 증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적 씨름 끝에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고, 아퀴나스는 신학과 이성을 종합했다. 파스칼은 이성조차 인정해야 할 “마음의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20세기에 C. S. 루이스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형성한 지적 제자도의 본을 제시했다.

한때 무신론자였던 루이스는 이성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간 끝에 신앙에 이르렀다. 『순전한 기독교』, 『기적』, 『고통의 문제』와 같은 그의 변증서들은 기독교가 이성적 검증을 견디는 것을 넘어, 진리와 도덕, 의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틀임을 보여준다. 그는 “나는 기독교를 해가 떠올랐다고 믿듯 믿는다.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이성의 제자도다. 그리스도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보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지적 깊이를 회복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려운 질문을 억누르지 않고 환영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변증과 세계관 훈련이 선택 과목이 아니라 제자도의 핵심이 될 것이다. 로마서와 함께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모임, 『고백록』을 함께 탐독하는 공동체를 상상해 보라. 성경의 깊이를 파고들며, 동시에 복음이 오늘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여주는 설교를 상상해 보라.

이성의 제자도는 철학자를 양성하는 일이 아니다. 현실을 분명히 보고, 지적 폭풍을 견디며,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성도를 세우는 일이다. 마음이 새로워질 때, 삶 전체가 강건해진다.

마음의 제자도: 상상력을 통해 영적 애정을 깨우다

현대 세계가 이성을 회의로 압박한다면, 마음은 무감각으로 무디게 만든다. 우리는 끝없는 산만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오락과 기술, 소비주의의 지속적인 소음이 영혼을 마비시킨다. 여백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은 쉽게 질식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경험한다. 신앙은 위로를 주는 얇은 층으로 전락한다. 치료적이고 감상적이며 취약하다. 잠시 위로는 주지만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

그러나 제자도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바르게 사랑하는 문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사랑의 무질서’라고 했고, 구원은 사랑이 하나님께로 재정렬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시 73:25)라고 고백했다. 참된 제자도는 거룩함과 아름다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을 일깨운다.

예수는 이를 잘 아셨다. 그분은 교리를 강의하기보다 비유로 상상력을 흔들었다. 탕자, 선한 사마리아인, 겨자씨의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를 그리게 만들었다. 예수는 무너진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현실을 상상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했다.

C. S. 루이스는 이 차원을 탁월하게 이해했다. 그의 에세이는 이성을 설득했지만, 그의 소설은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독자들은 아슬란의 선하심을 맛보고, 순종과 희생이 짐이 아니라 기쁨임을 발견한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는 자기중심적 선택의 영원한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루이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래서 제자도에는 상상력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은 메마른 지성주의나 경직된 도덕주의로 흐른다. 그러나 마음이 사로잡히면 제자도는 기쁘고 지속 가능한 여정이 된다.

교회는 예술과 이야기, 아름다움을 형성의 핵심 도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배는 정보 전달로 축소돼서는 안 되며, 찬송과 침묵, 전례와 시각적 아름다움을 통해 경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설교는 설명을 넘어 갈망을 깨워야 한다. 문학과 음악, 미술을 통해 신앙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루이스나 톨킨, 조지 허버트의 시를 함께 읽는 것도 논증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마음의 제자도는 욕망의 습관을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금식은 우리의 욕구가 궁극이 아님을 가르치고, 침묵은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한다. 섬김은 사랑의 방향을 바깥으로 돌린다. 자연과의 만남조차 창조주를 향한 갈망을 일깨운다. 루이스가 말한 이 ‘그리움’, 곧 ‘세운주흐트’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마음이 깨어날 때, 제자도는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제자는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공동체 안의 제자도: 은혜의 관계를 형성하다

이성이 설득되고 마음이 깨어나도, 공동체가 없으면 제자도는 무너진다. 기독교는 결코 고립 속에서 살도록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백성을 형성하셨다. 아브라함의 가족, 이스라엘의 언약, 사도행전의 교회가 그렇다. 바울의 서신은 “한 몸”, “살아 있는 돌”,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현대 서구는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소비자로 대한다. 유익할 때 참석하고, 불편해지면 떠난다. 신앙은 개인적 여정으로 축소되고, 그 결과 제자도는 얕아져 어려움 앞에서 쉽게 포기된다.

성경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다.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힘썼다(행 2:42). 그들은 자원을 나누고 짐을 함께 지며, 공동의 삶으로 복음을 구현했다. 그들을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프로그램이나 건물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관대함이 넘치는 공동체적 삶이었다.

루이스 역시 이를 몸소 보여줬다. 톨킨을 비롯한 잉클링스와의 우정은 단순한 문학 모임이 아니라 영적 교제였다. 그들은 서로의 이성을 날카롭게 하고, 상상력을 북돋우며, 신앙 안에서 격려했다. 루이스는 제자도가 공동체 안에서 번성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타인의 얼굴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오늘의 교회는 성도가 진정으로 알려지고 사랑받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그룹과 멘토링은 교재를 넘어 실제 우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함께 식사하고, 죄를 고백하며, 짐을 나누는 관계가 필요하다. 세대 간 제자도를 통해 연장자가 젊은 이를 이끌고, 지혜와 본을 전수해야 한다.

환대는 핵심이다. 단순한 접대가 아니라 삶을 나누는 환대가 형성의 강력한 도구다. 식탁과 거실에서 제자도는 살아 움직인다. 공동체는 쉽지 않다. 인내와 용서, 취약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신앙은 유지되고, 상처는 치유되며,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배운다.

탈기독교 시대의 전인적 제자도

오늘날 제자도를 향한 도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세속주의는 신앙을 비이성적으로 치부하고, 상대주의는 확신을 무너뜨리며, 개인주의는 신자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예수의 부르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를 따르라.”

이에 응답하기 위해 교회는 전인적 제자도의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 진리로 이성을 훈련하고,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깨우며,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지속하게 하는 제자도다. 이성, 상상력, 공동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분명히 생각하고, 깊이 사랑하며, 함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는 의미와 아름다움, 소속을 갈망하는 문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제자가 된다.

루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몸으로 살아내는 온전한 제자를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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