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일곱 가지 영원한 진리’(7 timeless truths about the incarnation of Christ)를 2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성탄절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어떤 종교적 주장과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구유에 누인 아기, 천사들, 목자들, 그리고 평화를 노래하는 찬송. 이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익숙한 장면들 아래에는 하나님, 인간, 그리고 구원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지극히 급진적인 선언이 자리하고 있다.
기독교는 인간이 신성을 향해 위로 손을 뻗는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아래로 내려오신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고,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으며, 그 어떤 철학이나 도덕 체계, 종교적 사유로도 결코 알 수 없었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단지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보여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멀리 머무르지 않으시고 가까이 다가오셨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관념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단지 그분의 지상 생애의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어떻게 구원하시고 회복하시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믿음은 이 놀라운 진리에 기초한다. 곧 하나님이 인간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탄을 제대로 묵상한다는 것은 감상적인 정서를 넘어 그 경이로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고, 참된 위대함의 본질을 보여 주며, 시간 속에 뿌리내린 확실한 구원의 소망을 제시한다. 다음의 일곱 가지 영원한 진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옷을 입으셨는지를 다시금 경건하고 신중하게 바라보게 하며, 이 사건이 왜 여전히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남아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1. 성육신은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자기 계시다
인류는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고, 양심은 그분의 도덕 법칙을 속삭이며, 역사는 신성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인간의 수많은 시도를 기록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것들만으로는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없다.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바르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알리셔야 한다(고전 1:21).
그 일이 바로 성육신에서 일어난다.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인간은 탐구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다. 인간의 지성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할수록 혼란은 깊어진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멀리서 보여 주는 모형을 보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유한한 인간의 마음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추상적 설명이 아니라, 한 인격의 삶 속에서 드러난다. 상처 입은 자들을 향한 긍휼, 더디 믿는 자들에 대한 인내, 위선에 대한 엄중함, 약한 자들에 대한 온유함, 정죄보다 고난을 택하신 태도는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의 계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2. 성육신은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성육신이 역사가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인간의 죄와 고통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식이다. 그렇게 읽으면 성탄은 상황에 대한 반응, 사태가 악화된 후에 내려진 은혜로운 처방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더 깊고 위로가 되는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즉흥적 결정이 아니었고, 단순한 역사적 환경의 산물도 아니었다. 성경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한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증언한다. 이는 죄가 사소했다거나 악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타락은 실제였고 비극적이었으며 파괴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초래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의 반역은 중대했고 심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놀라게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손을 강제로 움직이게 하지도 않았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창세 전에 미리 아신 분으로, 그리고 마지막 때에 우리를 위해 나타나신 분으로 말한다(벧전 1:20). 이는 베들레헴 이전, 에덴동산 이전의 영원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역사는 무대를 제공했지만, 목적은 영원에서 정해졌다. 성육신은 상황이 요구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이 이미 결정한 일이었다.
죄인들이 존재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사랑을 두시고, 결국 그들을 위해 직접 오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경이로움이다.
성탄은 영원에서 계획된 것이 시간 속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구유의 아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즉흥적이지 않았고, 구원이 인간의 실패에 대한 단순한 대응이 아니었음을 증언한다. 역사 속에서 전개된 일은 창세 전부터 세워진 설계의 실현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이 개념은 인간의 이해 한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다.
3.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을 혼합하지 않으면서 참되게 연합시킨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시간 속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사상이나 상징, 일시적 현현의 형태가 아니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단지 세상에 가까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과 완전히 연합하신 사건이다.
이 연합은 유례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멈추지 않으시며, 인간성은 신성 속에 흡수되지도 않는다. 예수는 반은 하나님, 반은 인간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처럼 보이신 것도 아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
이 구분은 단순한 신학적 정밀성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 자체에 필수적이다. 참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고, 죄를 권위 있게 사하시며, 죽음을 결정적으로 이길 수 있다. 동시에 참 인간만이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고, 우리의 죄값인 죽음을 대신 감당할 수 있다. 성경은 이 두 진리를 함께 붙든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히 2:14).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못하다면 구원할 수 없고, 인간보다 못하다면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
다니엘 웹스터는 이 신비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예수가 어떻게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일 수 있는지 이해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만약 자신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는 자신보다 위대한 분이 아닐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완전히 설명 가능한 구세주는 참된 구세주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은 단지 화해된 것이 아니라 결합되었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딤전 2:5). 이 연합이 실제적이고 영원하기 때문에, 구원은 일시적 해결책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원히 안전한 구원이 된다.
4. 성육신은 참된 위대함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한다
고대 세계에서 통치자나 영웅, 철학자가 신격화되는 과정은 거의 언제나 ‘상승’의 움직임이었다. 강력한 인물들이 정복, 정치 권력, 군사적 승리,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우월성을 입증한 후 신적 존재로 선언되었다. 파라오와 로마 황제들, 헤라클레스와 같은 신화적 영웅들은 이미 타인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신격화되었다. 신격화는 권력을 정당화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정치적 도구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독교는 비범한 인간이 신의 지위로 격상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연약함 속으로 내려오셨다고 선포한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 전복적 진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위대함의 개념을 근본에서 다시 정의한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지만, 그것을 움켜쥐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고대 종교적 상상력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방 종교의 신격화가 힘을 미화했다면, 성육신은 연약함을 거룩하게 한다. 황제들이 지배하기 위해 신성을 주장했다면, 그리스도는 섬기기 위해 영광을 내려놓으셨다. 신화가 상승을 노래했다면, 복음은 하강을 선포한다. 다른 이들이 제사를 요구할 때, 그리스도는 제물이 되셨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실패한 영웅을 높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상처를 지니고, 발을 씻기며, 원수를 용서하신 부활의 주를 만났기 때문에 이를 선포했다. 다른 모든 경우에서 신격화는 인간의 야망을 섬겼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신성은 인간의 구원을 섬긴다.
5. 성육신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준다
인간의 능력은 대개 강제력, 통제, 결과를 강요하는 힘으로 표현된다. 권위는 상대를 억누르고, 반대를 침묵시키며, 저항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입증된다. 제국에서 현대 제도에 이르기까지, 힘은 지배의 정도로 측정된다.
성육신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강압으로 세상에 들어오지 않으신다. 장관으로 적을 압도하지도, 압도적 힘으로 저항을 분쇄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연약함 속으로 오신다.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 유아기의 취약성, 평범한 삶의 제약을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처음부터 성육신은 하나님의 능력이 겸손으로 인해 약화되지 않음을 선언한다. 오히려 그 겸손을 통해 능력이 드러난다.
이 패턴은 예수의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다. 예수는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신다(마 4:8–10; 요 18:36). 지배를 통한 통치를 거부하신다. 그분은 군대를 잠잠케 하지 않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며(막 4:39), 정치 체제를 고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마 8:16–17), 경쟁자를 제거하지 않고 귀신을 쫓아내신다(눅 4:40–41). 거절과 배신, 폭력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신다(사 53:7; 벧전 2:23). 그분의 능력은 진리와 긍휼, 희생적 사랑을 통해 행사된다(요 1:14; 마 12:20).
이 진리는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약함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사실은 신적 능력의 결정적 행위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고 말한다(고후 13:4). 성육신은 강제의 보좌가 아니라 희생의 십자가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상 밖의 자리에서 죄는 패배하고, 죽음은 무너지며, 구원은 영원히 확보된다.
물론 성경은 동시에 분명히 말한다. 겸손으로 오신 그분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셔서 모든 것 위에 권세와 심판을 행사하실 것이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디까지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원수를 짓밟아 정복하지 않고, 그들의 죄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심으로 승리하신다. 고난을 가함으로 이기지 않고, 고난을 감당함으로 승리하신다.
6. 성육신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성육신은 즉흥적인 종교적 발상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의 포대기에 싸여 도래했다. 성경의 첫 장들부터 하나님은 오실 구속자를 말씀하셨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다윗의 가문에서 나오고, 정하신 때에 오실 분이었다. 성탄은 새로운 이야기의 창작이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의 성취다.
이스라엘은 수세기 동안 기다렸다. 선지자들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아이(미 5:2), 겸손히 오셔서 평화를 이루실 왕(슥 9:9), 타인의 죄를 위해 고난당할 종(사 53)을 예언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은 감정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실제 시간 속에서 신실하게 행동하시며, 그분의 약속이 공허하지 않고, 구속의 목적이 지연 속에서도 확실히 전진한다는 확신 위에 서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보증이다.
그러므로 성탄은 단순한 경이의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뢰 가능성을 표시하는 이정표다. 구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잊히지 않았고, 무기한 연기되지 않았으며, 조용히 폐기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약속은 정해진 때에, 정확하게, 완전히 성취된다.
7. 성육신은 겸손한 순종과 신뢰, 예배의 삶으로 우리를 부른다
성육신은 단지 묵상할 교리나 동의할 신앙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요구하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실제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며,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무관심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성육신은 응답을 요구하며, 그 응답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신 그분은 이제 겸손과 믿음, 순종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성탄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신뢰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
이 순종은 두려움이나 강요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분으로 드러내셨는지에 대한 확신에서 흘러나온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멀고 무관심하며 신뢰할 수 없는 분이 아님을 확증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로 들어오셨고, 수세기에 걸친 약속을 지키셨으며, 자신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구원을 이루셨다. 그런 하나님은 신뢰받기에 충분하다. 그분을 의지하는 것은 순진함이 아니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다. 그분께 순종하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마땅한 응답이다.
성탄은 일 년에 한 번 기억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진리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옷을 입으셨다면, 우리의 응답은 감탄이 아니라 헌신이어야 하고, 감상이 아니라 신뢰여야 하며, 무관심이 아니라 예배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은 이제 회개와 믿음, 전적인 신뢰로 응답하라고 부르신다. 성탄이 궁극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는 죄를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신 사건이며, 그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성탄이 선포하는 모든 경이 중의 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