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는 파키스탄 의회가 오랜 논의 끝에 소수자 권리를 전담하는 국가기구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다고 12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파키스탄 의회는 지난 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2025년 소수자 권리 국가위원회 설립 법안(National Commission for Minorities Rights Bill 2025)’을 표결에 부쳐 과반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로써 비무슬림 공동체의 권리 보호와 정책 점검을 담당할 공식 기구 출범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해당 법안은 정부가 임명하는 소수자 권리 국가위원회를 설치해 종교적 소수자들의 권리 침해 사례를 점검하고, 정부 정책의 이행 상황을 감시하며, 관계 부처에 소수자 복지와 관련한 자문을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당초 초안에 포함됐던 조사 개시권과 공직자 소환권 등이 최종안에서 삭제되면서, 위원회의 독립성과 실효성을 둘러싼 비판도 동시에 제기됐다.
새 법률에 따르면 위원회는 총 18명으로 구성된다. 힌두교인 3명 가운데 2명은 하위 카스트 출신으로 포함되며, 기독교인 3명, 시크교인 1명, 바하이교인 1명, 파르시 공동체 대표 1명, 그리고 무슬림 인권 전문가 2명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여기에 파키스탄 4개 주(州)는 각 주의 인권 또는 소수자 담당 부처에서 대표 1명씩을 추천하고, 이슬라마바드 지역에서 소수자 대표 1명이 추가된다. 위원 전원은 총리가 임명하며 임기는 3년이다.
CDI는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사를 개시하거나 증인을 소환하고 구금 시설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러한 권한은 지난 5월 12일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에게 송부됐던 이전 법안에는 포함돼 있었으나,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광범위한 재검토를 요청하며 의회로 환부한 이후 삭제됐다. 당시 일부 의원들과 정부는 위원회에 ‘직권 조사(suo motu)’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법안 상정 과정에서 야당의 반발도 거셌다. 파키스탄정의운동당(PTI)과 이슬람성직자연합(JUI-F)은 아잠 나지르 타라르 연방 법무·인권부 장관이 법안을 표결에 부치자 의회에서 강하게 항의했다. 타라르 장관은 본회의 발언에서 “법과 헌법, 그리고 우리의 양심은 쿠란과 순나에 어긋나는 제안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초안에 대해 네 가지 수정안이 제안됐고, 이 내용이 최종 법안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표결 결과 찬성 160표, 반대 79표로 법안은 통과됐다.
타라르 장관은 헌법상 소수자는 ‘비무슬림’으로 규정돼 있다고 강조하며 “이 위원회는 비무슬림을 위한 기구이며, 힌두교인과 기독교인, 파르시 형제들은 우리와 다름없는 파키스탄 국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2014년 당시 대법원장이었던 타사두크 후세인 질라니 판사가 소수자 권리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 설립을 명령한 판결을 언급하며 이번 법안의 의미를 설명했다.
헌법 제75조 2항에 따라 이번 법안은 다시 대통령에게 회부된다. 해당 조항은 대통령이 10일 이내에 법안에 재가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재가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법안 통과를 두고 신중한 환영의 뜻을 밝혔다. 사회정의센터(Center for Social Justice) 대표 피터 제이컵은 의회를 통과한 법안의 최종 내용이 명확히 공개되지 않아 혼선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2월 2일 국회 웹사이트에 게시됐다가 삭제된 초안에는 위원회가 18명으로 구성된다고 명시돼 있었다며, 정부가 최종안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구성에 대해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 알려진 형태대로 연방과 각 주를 반영한 비례적 구성이 유지된다면 긍정적인 제도 정착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평가했다.
제이컵 대표는 특히 위원회의 직권 조사 권한이 삭제된 점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정부 부처나 다른 기관의 압박으로 문제 제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위원 선임 과정에서 능력과 전문성을 기준으로 한 인사가 이뤄져야 정부 구조 전반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포용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파키스탄 소수자 연합 의장인 악말 바티 변호사도 비슷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대법원의 2014년 지시가 오랫동안 이행되지 않았고, 법안이 대통령실에서 1년 넘게 지연됐다고 지적하며, 이번 입법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바티 의장은 정부가 국내 소수자 보호보다는 유럽연합(EU) 감시단의 시선을 의식해 법안을 추진한 인상을 준다며, 헌법적 책무보다 국제사회의 평가를 우선시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특히 정부 추천 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차별적 정책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위원회가 권고만 할 수 있을 뿐 제도 개선을 강제하거나 책임을 묻는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는 설명이다. 여성 위원 33% 참여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소수자 대표 비율이 축소된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위원회 보고서가 상원 인권상임위원회와 하원 인권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 구조 역시 위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파키스탄 인권위원회(HRCP)는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법안 통과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HRCP는 입법 과정에서 정치적 마찰이 있었음을 언급하면서도, 새로 설립될 위원회가 어떠한 차별이나 위계 없이 모든 종교적 소수자를 동등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위원회의 권한과 임무가 종교의 자유와 차별 금지를 보장한 헌법 정신에 엄격히 부합해야 한다고 밝혔다.
파키스탄 전체 인구 약 2억 4,150만 명 가운데 기독교인, 힌두교인, 시크교인은 약 4%를 차지하고 있다. 인권 단체들은 구조적인 차별과 빈곤, 교육과 고용 접근의 제약으로 인해 이들 공동체가 각종 인권 침해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