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꺼지지 않는 전쟁의 불길과 한반도의 현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불길은 좀처럼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총성과 포연은 더 이상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가 일상적으로 불안해하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현실 역시 더욱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과연 평화의 아기는 다시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다툼과 분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이제 마침표를 찍고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마저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아 인간관계와 사회를 붕괴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로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보복이든 응징이든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입니다.
◆ 전쟁의 역사와 인류가 얻은 교훈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이후에도 100여 개국에서 1300여 건에 이르는 분쟁과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만 약 천만 명이 희생됐고,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 등을 거치며 약 5천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날에도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20세기 100년 동안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 자유가 낫고, 자원보다 두뇌가 낫고, 대립보다 공존이 낫다는 사실입니다.
대립은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공존은 함께 살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함께 잘 살아가자는 형제애의 정신에서 출발합니다. 이는 단순히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을 넘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 공존의 비유와 성서의 메시지
나와 다른 생각과 모습, 문화를 지닌 존재를 틀렸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공존입니다. 이는 모든 악기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악기가 각자의 소리를 내며 하나의 화음을 이루는 오케스트라와도 같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존의 뜻을 품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멀리 계신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 계신다는 약속과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피조물과 조물주,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 ‘평화의 아기’ 이야기
이러한 맥락에서 성탄절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옛날 인도네시아 아리안자야족에 복음을 전했던 돈 리처드슨 선교사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식인 풍습이 남아 있었고, 부족 간의 전쟁도 극심했습니다. 서로 싸우다 화해를 청할 때면 자기 마을의 갓난아기를 적군에게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아기를 ‘평화의 아기’라 불렀다고 합니다.
리처드슨 선교사가 이곳에 간 지 2년이 되던 해, 다시 부족 간 전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선교사 부부가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전쟁터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습니다.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던 양측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자신들의 아기를 평화의 아기로 내어놓았습니다. 그 순간 양쪽 진영에서 터져 나온 함성은 공격의 신호가 아니라 평화의 도래를 알리는 기쁨과 환호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를 불신하던 자야안 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평화의 아기는 곧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오셨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증오의 벽을 허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평화의 아기입니다.
◆ 한반도 현실과 신앙의 질문
아기 예수의 탄생과 함께 천사는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를 돌아보면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적대하며 총칼을 겨누고 살아왔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가장 먼 존재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온 시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형제와 부모를 학살한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북한은 반드시 섬멸해야 할 영원한 적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깊이 자리 잡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성서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한 이유를 다시 묻게 됩니다.
◆ 평화로 가는 길, 사람의 마음에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은 남과 북의 분단과 지역 갈등, 경제적 불평등, 성별 차별 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 3·1운동 당시 서로 다른 입장에 있던 종교인들이 힘을 모아 평화의 길을 모색했던 것처럼, 오늘의 시대 역시 더욱 간절한 연대와 협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면 그것은 제도나 협정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참된 평화의 길은 정복의 결과가 아니라, 포연 속에서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한반도가 붙잡아야 할 가장 현실적인 희망입니다.
가장 지존하신 분이 가장 낮은 구유에 나셨던 평화의 정신이 이 땅 위에 다시 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올 성탄절과 다가오는 새해가 그 정신을 실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평화의 왕이 오시기를 기도로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