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보통 복음의 선포(preaching), 교육(teaching), 그리고 치유(healing)로 요약된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섬세하게 가르쳐주시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보며 힘과 위로를 얻는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막1:30-31), 눈먼 자를 뜨게 하셨으며(요9:6-7), 오랫동안 장기적인 질병과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하셨다(마9:22). 인간의 노력으로 치료받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만성적인 질병도 예수님의 치유 능력 앞에서는 기적같이 회복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몸의 회복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만성적인 질병으로 남 탓하며 심리적으로 무기력해 있는 이를 독립적인 사람으로 고치셨으며(요5:5-9), 나아가 영적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고 구원하셨다(막1:25-26). 그의 치유는 죄 사함의 은혜까지 연결되어 환자였던 이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사회와의 화해까지 이루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인적인 치유였던 것이다(눅17:14). 예수님의 치유는 병든 이들의 위로였고, 희망이었으며 구원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내가 갖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 그리고 심리적인 어려움, 영적 고통이 해결되기를 믿으며 소망한다. 소위 난치병으로 알려진 병을 갖고 있거나, 혹은 노화의 과정에서 쇠퇴해 가는 자신의 몸의 한계를 날마다 직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고통인가? 우리는 자신의 몸의 고통을 보며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나를 힘 있게 하기를 소망한다. 마음의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만성적인 우울과 불안은 개인으로 하여금 현재를 충실히 살기 어렵게 하는 장벽이 된다. 우울감은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낙심, 미련과 상실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는 사람은 우울감에 빠져들기 쉽다. 또한 불안은 미래에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에 대한 생각에 압도된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불안하게 되면 현재 일어나는 즐겁고 행복한 경험을 포착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그 예기 불안은 일종의 자기충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되어 내가 예상했던 부정적인 심리적 경험이 실제로 발생하고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경험이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 잡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몸의 고통이든, 정신의 고통이든 그 기원이 외적인 상황에서 기인 되었든, 내면에서 생성된 왜곡되고 과장된 고통이든 인간이 겪는 병적 고통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치료, 완치만이 아니다. 때로는 오래된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어려운 이들도 있다. 완전한 치유가 아닌 조절하며 적응하고 고통을 수용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 경우가 더 많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의 심리치료에서는 고통을 수용하고 회피하려고 하기보다 수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용전념치료가 각광을 받고 있고, 신체적인 고통 또한 그 병명에 압도당해 자신을 부정적인 진단명에 가두기보다, 그 병의 과정을 수용하고 직면하며 삶에 대한 진지한 수용을 강조하는 입장이 강조되고 있다. 병적인 어려움을 싸워야 할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삶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그 어려움을 피할 문제가 아닌 다루어야 할 삶의 과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 진단받은 병명 즉 자신의 질병명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 주관적인 고통의 수용 정도에 따라 그 질환의 경험이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을 시작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관심갖기 시작한 영성 노년학(Spiritual Gerontology)에서도 건강하고 풍성한 나이 듦을 위해서는 자신의 노화와 질병을 수용하는 마음의 힘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도 문제 자체의 해결만이 아닌 그 문제를 통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며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주님이 그냥 단번에 말로 고치시지 않고, 환자들이 대중들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제사장에게 가서 병의 나음을 증명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당당히 행하도록 하시며,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수용하도록 도와주신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통이 남아있다. 몸과 마음의 질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그 단계들을 주님과 같이 넘어가는 가는 우리의 몫이다. 질병에 압도되지 말고,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고 단단하게 넘어가자. 질병이 아니라 질환으로 말이다.
#이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