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랑과 분노의 사이에 선 존재”

브라이언 해리스 박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브라이언 해리스 박사의 기고글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본성과 악마적인 성향, 그 두 가지와 씨름한다는 뜻이다’(To be human means to deal with both our divine and demonic tendencies)를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해리스 박사는 컨설팅 회사인 Avenir Leadership Institute를 이끌고 있으며 이 단체는 전 세계에 필요한 리더 양성을 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이런 농담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고객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라면, 왜 노아가 방주에 사람 대신 동물만 태웠는지 이해할 것이다.” 배달 실수로 사과 대신 배를 받은 고객이나, 밀크 초콜릿 진저비스킷 대신 다크 초콜릿 버전이 온 것에 분노하는 고객을 상대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절로 웃음을 자아낼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 우리를 얼마나 옹졸하고 비뚤어지게, 그리고 표면 아래에서 끓는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드는지 놀랍지 않은가?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상황이 바뀌면, 같은 사람이 놀라울 만큼 관대하고, 희생적이며, 인내심 깊고, 따뜻한 격려자가 되기도 한다.

인간 안에 이렇게 극단적인 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내 안에 있는 이 ‘폭’에 가장 실망한다. 필자는 쉽게 소리 지르거나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안에 이런 상반된 면모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늘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많은 상황에서 필자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를 ‘선’을 넘어가는 순간, 필자의 태도는 냉소적으로 굳어지고, 내면의 비판가가 고개를 들며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무심해진다.

어떻게 이런 이해심 깊은 나와 판단적인 내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둘 다 내 안에 있고, 그 사실이 필자를 괴롭게 한다. 이 문제는 사실 기독교 신학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낯선 주제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창세기 2장 7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의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즉,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이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와 필자는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미미한 존재다. 그래서 장례식에서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Dust to dust, ashes to ashes)”라는 말이 낭송된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기(breath of God) 가 우리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었다. 흙이 우리의 비천함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의 숨결은 우리의 존귀함을 상징한다.

창세기 1장 27절은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라.” 그렇다. 우리는 단지 존재하는 것 이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놀라운 존재, 창조의 정점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신성과 타락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인간 창조의 영광을 보여주지만, 바로 다음 장인 3장은 그 깊은 타락의 심연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난다.

창세기 4장은 그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며 형제가 형제를 죽인다. 세상 최초의 부모는 살인자를 자식으로 둔 부모가 된다. 형제애는 깨지고, 피로 얼룩진 인류의 초상화가 펼쳐진다. 인류의 역사는 그 이후 끝없는 전쟁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것은 창세기의 초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편 8편 5절은 말한다: “주께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139편 14절도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오니, 주께서 나를 두렵고도 놀랍게 지으셨나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로 빚어진 존재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지문과 악의 흔적이 함께 있다.

우리는 모순된 존재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부정하고, “우린 다 멋지고 선한 존재야”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 환상이 무너질 때면, 극단적으로 자신을 혐오하며 “우린 아무 가치 없어”라는 절망으로 떨어진다. 때로는 코끼리나 쥐가 인간보다 더 공감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찰은 결국 로마서 3장 23절의 진리를 다시 상기시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많은 사람은 이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무슨 악당이라는 거야?”라고 반응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란 최악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것, 즉 ‘과녁에서 빗나감’을 뜻한다.

즉,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나보다 덜 된 존재”라는 뜻이다. 이건 사실 모든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부족함의 결과인 혼돈과 파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해결된다. 그분의 십자가는 용서의 자리이자, 새롭게 시작할 초대의 자리이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도록 부르신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늘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두렵고도 놀랍게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이다. 그러니 오늘 당신이 사소한 일로 기분이 상했다면, 한번 물어보라. “나는 지금 하나님이 의도하신 나다운 모습을 살고 있는가?” (참고로, 슈퍼마켓에서 누가 새치기했다고, 혹은 주차 자리를 빼앗겼다고 당신이 그토록 화내도록 창조된 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사랑과 선함을 대표하도록 만드셨다. 그렇다면 그것이 오늘 당신의 삶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좋은 질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묵상한다면 인간들까지 태울 수 있는 또 다른 ‘방주’, 즉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공동체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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