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100일을 맞았다. 미국의 통상 압박이 거세지는 시점에 취임한 그는 열흘 만에 미국을 방문해 한국의 대미 투자 확대와 상호 관세 인하를 핵심 의제로 제시하며 첫 외교 행보를 시작했다. 귀국 후에는 세제개편안, 경제성장전략, 예산안을 잇따라 발표하며 새 정부 경제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정부는 잠재성장률 3% 달성을 목표로 인공지능(AI)과 초혁신경제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예산·세제·금융 등 다각적 지원 패키지를 마련하고, 기업 활동의 제약을 줄이기 위해 배임죄 폐지 등 경제형벌 합리화와 규제 완화를 병행 추진 중이다.
10월 들어 구윤철 부총리는 본격적인 경제외교에 나섰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총회에 참석해 다자외교 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이 자리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통화스와프와 대미 투자 구조를 논의했고, 인천 영종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재무·구조개혁장관회의에서는 의장국 자격으로 AI·디지털 전환을 주요 의제로 제안하며 역내 협력 강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구윤철 경제팀 앞에는 여전히 난제가 산적해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방식과 기간을 놓고 이견이 커 3개월 넘게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대해 25%의 상호관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동차 등 주요 품목에도 일본·EU보다 높은 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협상 결렬 시 반도체·의약품 등 핵심 수출 품목에도 불리한 조건이 적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실제 대미 수출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10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대미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24.7% 급감했다. 추석 연휴로 조업일수가 줄어든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하락 폭이 크다. 반면 미국이 요구한 3,500억 달러의 선(先)투자는 외환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어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4,200억 달러 수준이며, 연간 최대 동원 가능 금액은 200억 달러에 그친다.
환율 시장도 불안하다.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23일 1,440원을 돌파해 5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고, 24일에도 1,437.1원으로 마감했다. 최근 3개월간 4.7% 상승한 수치로, 외국인 자금 유입에도 환율이 오르는 것은 이례적 현상이다.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는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한미 합의 도출을 목표로 막판 협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미국 측도 대규모 선투자가 한국 외환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며 “양국은 통화스와프보다 투자 구조 설계에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직접투자·대출·보증이 혼합된 균형 잡힌 투자 패키지를 설계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국내 경제에서는 부동산 시장이 가장 큰 리스크로 꼽힌다. 서울 고가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과열 양상이 한강벨트와 경기 지역으로 확산됐다. 9월 기준 서울 아파트 가격은 연초 대비 5.64% 상승했으며, 송파(14.93%), 서초(11.66%), 강남(11.50%) 등이 상승세를 이끌었다. 정부는 수요 억제책(6·27, 10·15 대책)과 공급 확대책(9·7 대책)을 병행했지만, 효과는 아직 제한적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10월 3주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률은 0.50%를 기록했다.
한편 재정 건전성 악화도 우려된다. 정부가 발표한 ‘2025~202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향후 5년간 재정지출은 연평균 5.5%씩 증가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2025년 111조6천억 원에서 2029년 124조9천억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국가채무는 1,788조9천억 원으로 GDP 대비 58.0%까지 상승할 전망이다.
구 부총리는 재정을 성장의 마중물로 삼아 세수 확충과 재정 건전성 회복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비생산적 부문에 재정이 과도하게 투입될 경우 효과가 떨어질 수 있으며, 프랑스 사례처럼 재정 불안이 금융시장 불안으로 번질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 1월부터 정부조직개편으로 기획재정부의 기능이 분리되면서 경제 컨트롤타워의 위상 약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경제·세제·국제금융 기능은 재정경제부로, 중장기 기획 및 예산 기능은 기획예산처로 분리되면서 부총리가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기획과 집행이 분리되면 견제를 통한 합리적 예산 집행은 가능하지만,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의사결정 속도가 떨어질 수 있다”며 “컨트롤타워의 즉시 대응 능력 약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도 “경제부총리의 정책 조정 기능이 약화되면 정책 효율성이 저하될 수 있다”며 “거버넌스 조정과 일관성 확보를 위한 부총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대미 통상, 부동산, 재정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정책 기획과 조율 능력을 시험받고 있다. 경제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가 향후 한국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