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12) 낮은 자가 부른 행복의 노래

오피니언·칼럼
설교
시 131:1-3
이희우 목사

금년 1월 9일에 있었던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은 마치 축제 같았었다. 아름다운 ‘굿바이 카터’, 퇴임 후 돈 벌 기회를 다 사절하고 방 두 칸짜리 집에서 검소하게 살고, 사업가 친구들의 전용기를 마다하고 여객기 이코노미석을 탔던 그분은 정말 검소한 분이셨다. 뿐만 아니라 건강이 악화될 때까지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했던 그분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셨다.

땅콩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77년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백악관 주인이 되어 재임 중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퇴임 후 해비타트(Habitat), 사랑의 집짓기 등 여러 자선활동과 비공식적 외교활동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 최고의 전직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분이다.

스스로를 거물로 여기지 않고, 거물인 척하는 사람도 싫어했던 카터, 세금으로 충당되는 전직 대통령 연금, 경호 비용, 기타 경비를 최대한 절약하셨다. 클린턴 127만, 조지 W 부시 121만, 오바마 118만, 트럼프 104만 달러에 비해 연간 49만6000달러, 절반 이하로 줄이셨던 멋진 분, 전 세계적으로 정말 존경받던 지미는 100세를 일기로 소천되셨다.

1970년대 말 ‘4월과 5월’이란 듀엣이 부른 ‘욕심 없는 마음’이라는 유행가가 있었다. ♬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작은 초가집/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구운 옥수수/ 욕심 없는 나의 마음 탓하지 마라/ 사람들아 사람들아 ♬ 초가집, 옥수수, 저고리, 성경책… 욕심 없는 마음을 단조로운 멜로디로 반복하는 경음악, 대중들의 인기가 높은 노래였다.

시편 131편을 읽다가 거의 50년이 된 이 노래가 떠올랐다.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욕심 없는 마음,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폭주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나 욕심으로 가득한 현대인들이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이런 노래를 접하면서 욕심 좀 내려놓길 기대해 본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성경이 경고했기 때문이다.

시편 131편은 순례자의 노래 15편 중 ‘다윗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5편 중 하나인데 내용이 소박하고 평화롭다. 욕심이 없다. 시편 중 가장 짧은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지금까지 읽은 순례자의 노래들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순례자의 노래뿐만 아니라 시편 대부분의 시들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너무 소박하고 평화롭다. 탄식시의 격한 감정 표현도 없고, 고통이나 분노도 없고, 간절한 소원이나 간구도 없으며, 악인과 원수에 대한 복수나 승리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래서 구약학자 A. 바이저(A. Weiser)는 자신의 시편 주석에서 “이 시는 서산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조용하게 물든 황혼녘에, 어느 고요한 마을 위로 평화스럽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같다”고 했는데 다윗의 시라 더 신선하다. 일개 목동에서 일약 왕이 된 다윗,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얼마나 복잡한 일이 많았을까? 산더미처럼 쌓인 나랏일들로 머리가 복잡했을 거다. 한 마디로 피곤한 사람, 스트레스도 대단했을 것이다.

왕으로서는 절대 부르기 힘든 노래, 하지만 다윗은 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래서 시편 131편에 “낮은 자가 부른 행복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본다.

다 내려놓고

1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눈이 높은 데를 보지 않습니다. 나는 거창한 길을 좇지 않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습니다”인데,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하나님, 나는 대장이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고 거창하고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교만하다’는 것은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것, 자기 능력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다. 그리고 ‘높은 데’는 권력이나 명예나 직위가 높은 자리, ‘거창한 길’과 ‘주제넘은 놀라운 일’은 대형 국책 사업이나 국민운동, 혹은 새로운 프로젝트나 조직 만들기 등이다. 창조적일 수 있지만 자기 정치생명이나 지위가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 다윗은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겠다는 거다.

다윗이 늙었을까? 아니면 겸손의 소중함을 깨달았을까? 교만하지 않겠다고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거스틴(Augustine)은 “기독교의 최고 덕목 세 가지는 겸손, 겸손, 그리고 또 겸손”이라 했다. 뭔가 부족해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다. 개빈 오틀런드(Gavin Ortlund) 목사는 자신의 책 『겸손』에서 “겸손은 나를 내려놓는 기쁨”이라 했다. 그리고 “겸손은 감추는 것도, 자기혐오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개인의 삶을 회복시키는 능력이자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비결,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이자 기쁨”이라 했다.

스코티 스미스(Scotty Smith) 목사는 겸손을 “구원의 DNA를 품은 복음,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심장박동, 은혜의 풍성함을 잘 아는 마음과 성령님이 교회에 창조하신 문화”라고 했다. 맞다. 겸손은 성경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조희선이라는 사람은 ‘하느님 바보’라는 시를 썼다. “높은 것/ 낮은 것도 구별할 줄 모르고/ 좋은 것/ 싫은 것도 골라낼 줄 모르고/ 손해/ 이익 따윈 계산할 줄 모르고/ 네 편/ 내 편도 만들 줄 모르는/ 하느님은 바보/ 오직 하나, 사랑만 아시는/ 사랑밖에 모르는 하느님, 바보!”, 겸손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사랑, 겸손이 예수님의 길이었다. 생각해보라. 성육신도 십자가도 다 겸손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적인 선택도 겸손이어야 한다.

다윗은 이제 “큰일을 하지 않겠다”며 다 내려놓은 듯한 고백을 한다. 원래 나이 들면 포용력도 생기고,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람이 보수적으로 바뀐다. 처칠(Winston Churchill)이 “젊었을 때 진보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은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 보수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은 머리가 없는 것”이라 했는데 사람은 자기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 다윗은 작은 일을 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노닥거리고 운동하고 여행하는 것이 작은 일 같지만 이런 게 평화롭고 소중한 일이다. 그리고 큰일, 큰일 하지만 큰일도 작은 일들이 쌓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131편은 다 내려놓은, 낮은 자 다윗이 부른 행복의 노래였다.

젖 뗀 아이 같이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 2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발을 땅에 디디고 마음을 고요히 다잡으며 살았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만족하듯 내 영혼 만족합니다”, ‘고요하다’는 히브리어로 ‘샤바’(שאב), ‘동등하다, 평평하다’라는 뜻이다. 분노와 거친 감정이 가라앉고 통제가 된 상태, 마음의 평화를 말한다. 이 고요함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나라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들의 추한 욕심으로 국민들은 너무 힘들다. 그들은 나라나 국민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 욕심만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모두가 돌을 들고 치려하자 예수님이 땅에 뭔가를 쓰고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시자 죄다 자리를 떴는데 우리도 입 좀 다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동방예의지국의 위상을 회복하면 좋겠다.

이어서 다윗은 “내 영혼으로...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라고 노래했는데, ‘평온하다’는 히브리어로 ‘다맘’(דמם), ‘잠잠하다’ ‘침묵하다’ ‘기다리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무작정 뛰면 지칠 뿐, 그건 불안한 거다. 다윗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기를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있는 것 같게 하였다”고 했다. 엄마 품에 안길 때, 고요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아는 다윗, 그가 노래한 아기는 좀 자란 아이, 생각이 없는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맛있는 분유보다 아직 엄마 품이 더 좋다는 것, 그 아이에게 엄마 품은 가장 편안한 자리, 아무 걱정이 없는 최고의 안식처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아이가 되고 싶다. 권력과 부귀영화로 채워지지 않는 가슴, 그리고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하나님 앞에서 다 해결하고 싶다.

다윗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고요와 평안을 잘 지켰다.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도망치던 다윗, 그때 시므이가 비난하며 저주하지만 그의 입을 막지 않았고, 죽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16:10)라고 말하며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는데 저주하게 버려두라”(11절)고 한다. 다윗은 시므이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며 저주받으면서도 마음의 고요와 평온을 유지한다.

또 사무엘서에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24:6),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울에게도 복수하지 않는다. 아니 복수는커녕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며 마음의 고요와 평온함을 유지한다.

다윗의 이런 모습과 달리 늘 쫓기는 사람들이 있다.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핸드폰과 시계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특히 주일에는 더 그래야 한다. 주일에도 핸드폰 붙들고 시계 들여다보는 건 마음이 나뉘는 것, 부디 하나님 앞에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보이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느끼며 예배에 집중하기 바란다.

잘 보라.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크게 두 부류다.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어딘가로 계속 전화하며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 그러다 누가 오면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훌쩍 나간다. 반면에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창가에 앉아 멍 때리는 사람이 있다. 잠시 찻잔 보다가 창밖을 내다보고... 마치 차는 마시려고 시킨 게 아니라, 곁에 두려고 시킨 것 같다. 주인이 와서 “따끈한 차로 바꿔드릴께요”하며 다시 따끈한 차를 줘도 그 잔 앞에 놓고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갈 곳도 없는 사람처럼 그냥 앉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평화롭고, 자유롭다. 생각은 날개를 달고 시공을 초월하여 날아다니고, 감정이 다스려진다. 생각해보니 사는 게 다 감사하다.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일들이 떠오른다. 잊고 살던 사람들도 생각난다. 물론 좀 잘못 살고 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당연히 비참한 시간이 아니다. 더 잘해 보고 싶은 열정과 결단이 생긴다. 자신감이 생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설 때 그는 자유인이 되어 있다. 그 사람은 찻집에서 차를 마신 게 아니라, 기쁨을 마시고, 사랑을 마신 것, 거기서 생명 에너지를 마셨다. 묻는다. 어떤 쪽에 속하나?

소란스러운 시대, 이럴 때일수록 고요히 묵상하며 살아야 한다. 예배에 집중하라. 우리의 예배가 기쁨과 사랑과 생명을 마시는 은혜로운 시간 되기 바란다. 그러려면 먼저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갈데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앉아야 한다. 모처럼 만나 속마음을 좀 나누고 싶은데 상대방이 계속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불쾌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예배 시간 나의 모습이라면 어떨까? 안 된다. “하나님, 저 오늘 시간 많아요. 하나님 앞에 오래 있을 거예요.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하세요” 푸근하게 시간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기억하라. 131편은 엄마 품에 안긴 젖뗀 아이같이 낮은 영혼의 다윗이 부른 행복의 노래였다.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며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절)라고 노래한다. 늘 피곤하게 살 수밖에 없는 왕이지만 다윗은 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주 하나님 앞에 나갔던 다윗이라 그날도 하나님 앞에 앉았다.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것,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오늘만큼은 어떤 일에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자세다. 왜? 평안히 쉴만한 유일한 안식처,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친 후 북왕국 동맹 세력이 밀고 들어올 때 유다 왕이나 일부 세력들은 애굽과 연합하여 대항하려 했다. 애굽의 말과 마병을 의지한 거다. 그때 이사야 선지가 했던 말은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30:15), 꾀부리지 말고 입 다물라는 것, 섣부른 행동하지 말라는 경고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 쉬는 것과 좀 다르긴 하지만 쉰다고 생각해도 된다. 최소한 주일만이라도 좀 쉬라. 사업도 쉬고, 연애도 쉬고, 고민도 쉬고, 가정일도 쉬고, 정치 집회도 쉬고...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사바트’(שַׁבָּת),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는 날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2:2), 하나님께서도 모든 일을 그치고 쉬셨다. 쉴 줄 알아야 하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쫓기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말씀하고 싶으신데 “다음 주일에 뵙겠습니다” 그러지 말라. 영원까지 바라보는 낮은 자의 자세라면 낮은 자 다윗이 부른 행복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 될 수 있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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