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잭 사라 목사의 기고글인 ‘기독교 시온주의는 중동에서 우리의 복음적 증언을 파괴하고 있다’(Christian Zionism is destroying our gospel witness in the Middle East)를 최근 게재했다.
사라 목사는 베들레헴 성경 대학의 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복음주의 연합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교회 지도부와 함께 감독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중동 및 북아프리카를 위한 세계 복음주의 연합의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예루살렘의 한 병원에서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예방접종을 맞으려던 필자는 간호사로부터 여행 목적을 묻는 질문을 받았다. 필자가 “국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복음주의 목사”라고 답하자,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렇죠. 복음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잖아요.”
필자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종종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얼굴은 곧 진지해졌고, 감사하다는 말을 건넨 뒤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자들의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느껴요. 그들의 종말론적 관점 때문에, 우리를 모두 이 땅으로 모아놓고 전쟁이 일어나 우리가 죽게 되면 자기들의 메시아가 온다고 믿잖아요.”
그리고는 잊을 수 없는 비유를 덧붙였다. “그건 마치 오리를 살찌우는 남자 같아요. 매일 먹이고 돌보지만, 진짜 사랑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도살하려고 하는 거죠.”
그녀의 말은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가 만들어낸 거짓된 사랑에 대한 유대인의 깊은 불신과 불안을 정확히 표현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조작된 종말론에서 나온 계산된 친절이다. 겉으로는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유대인을 다른 사람의 예언 시나리오 속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며칠 뒤, 필자는 이스라엘 아침 뉴스에서 한 복음주의 지도자의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면서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회복시키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필자는 안타까운 역설을 느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불의에 침묵하고, 팔레스타인인(기독교인과 무슬림 모두)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에는 눈감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사례는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기독교 시온주의는 단순한 신학적 특이점이 아니라 복음의 걸림돌이다. 그것은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중동의 모든 민족에게 왜곡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성경적·신학적 문제점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창세기 12장 3절(“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이나 스가랴 14장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신약은 이러한 약속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는 곧 그리스도이며, 그에게 속한 자들이 모두 그 약속의 상속자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 3:16, 28–29).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에베소서 2:14).
따라서 이러한 약속들을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복음을 우회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린도후서 1:20)는 바울의 말처럼, 모든 언약은 예수 안에서 완성된다. 신학자 게리 버지는 저서 ‘Whose Land? Whose Promise?’에서 “기독교 시온주의는 교회를 구약의 그림자로 되돌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복음을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창세기 12장 3절의 축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사역 안에서, 그분의 나라 확장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유대인 복음 증언의 걸림돌
앞서 언급한 간호사의 고백은 복음주의자들의 “사랑”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보여준다. 복음의 문을 열기는커녕 오히려 불신과 경계를 굳힌다. 만일 복음주의자들이 단지 아마겟돈을 촉발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조작이다.
신약학자 스티븐 사이저는 ‘Christian Zionism: Roadmap to Armageddon?’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신학적 필수조건으로 홍보함으로써, 기독교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길을 가로막는다”고 경고한다.
진정한 복음의 증언은 정치적 의제와 결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예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명확히 드러내야 한다.
무슬림에게도 복음의 장애물
이 문제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랍과 이슬람 세계는 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다. 만약 그들이 억압, 폭력, 점령을 옹호한다면, 무슬림들은 기독교 전체를 불의한 종교로 본다.
그 결과 복음 전도는 무너진다. 복음의 좋은 소식 대신, 무슬림들은 “억압자들과 함께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본다. 기독교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정당화하는 한, 우리의 복음은 희망이 아니라 위선으로 들릴 것이다.
복음을 배반하는 정치적 동맹
텔레비전에 나온 한 복음주의 주교는 바로 그 배신을 상징한다. 그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약속하며 복음주의자들에게 국수주의적 충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9), “억눌린 자를 도우라”(이사야 1:17)고 말씀하셨다.
예언의 이름으로 불의를 지지하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행위다. 교회의 사명은 정치적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화해”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에베소서 2:14). 복음 대신 정치적 의제를 추구할 때, 교회는 섬겨야 할 하나님 나라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증언으로 돌아가자
이제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중 어느 한 편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다. 양쪽 모두의 고통을 품는,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적 사랑이다.
사람들을 종말론의 도구로 이용하는 허무한 예언 해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민족의 주이심을 선포하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질 것이다. 그때에만 우리의 증언은 모든 민족 앞에서 신뢰를 얻을 것이다.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사랑, 정의, 평화, 그리고 화해를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