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대륙에서 후천년설의 발전과 재평가
1620년 9월 6일 제임스 1세의 치하에서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던 청교도의 일부는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다. 그 뒤 남아 있던 이들이 올리버 크롬웰의 주도로 청교도 혁명에 성공했으나, 10여 년 만에 크롬웰이 죽고 찰스 2세의 왕정이 복고되자, 청교도는 다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찰스 2세는 즉위하자 곧 청교도 혁명의 사료와 흔적을 아예 말살해버리고, 1662년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반포하여 청교도를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남아 있던 청교도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려고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난 신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후천년설 신앙을 바탕으로 신대륙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공의와 평화의 나라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할 최적지였다.
청교도가 신대륙에서 정착에 성공하기 시작했던 18세기 초에 영국에서는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하여 이신론이 등장하였고,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그 사상이 신대륙에 건너오는 것도 시간 문제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대륙에는 청교도의 후예로 태어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23살부터 회중교회 목회자로 시무하고 있었다. 그는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으나 흔들리지 않고, 노스햄프턴(Northampton) 교회에서 25년간 사역했다.
(1) 신대륙에서의 대각성 운동과 역사적 사건들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 시절에 설교한 유명한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들)은 신자들에게 회심을 강조하면서 제1차 대각성 운동(First Great Awakening)을 촉발한 기폭제로 평가된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은 에드워즈의 목회지역을 시발점으로 했지만, 점차 신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 복음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목격한 청교도는, 신대륙을 하나님 나라 실현의 터전으로 인식하였고, 이를 영국 왕정의 식민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함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 제1차 대각성 운동(1735년-1755)과 그 영향
제1차 대각성 운동 시기에 신대륙과 영국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촉발되었다.
① 청교도 회중교회 목사였던 에드워즈가 강력한 회심 설교를 통해 제1차 대각성 운동에 불을 지폈다.
◆ 미국이 독립하기 전이었던 1735년에 시작한 제1차 대각성 운동으로 식민지에 복음이 확산되었다.
◆ 에드워즈는 이 운동을 통해 복음이 성공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역사적 징표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 징표의 뜻이 곧 천년왕국의 완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전조라고 해석했다.
◆ 그러나 그는 교회 회원권 제도를 개혁하려다가 교인 투표에서 거부당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 교회를 떠난 그는 이를 하나님께서 미전도 종족인 인디언 선교를 위해 기회를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열정적으로 선교에 헌신했다. 이는 후천년설을 지지하는 청교도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 인식과 일치하는 행동이었다.
◆ 이 무렵 영국에서 계몽주의에 의해 주장된 이신론은 신이 인간에게는 자유를, 물질에는 자연질서의 법칙을 부여하였음을 인간이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 자신은 초월자로 존재한다고 본다.
◆ 1738년에 영국에서 국교회 신부로서 칼빈주의자이며, 야외 설교로 유명한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신대륙을 방문하여 야외 설교로 큰 호응을 얻었다.
◆조지 휘필드는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의 노스햄프턴 교회에서 설교(1740)한 것을 계기로 지역적 부흥에 머물렀던 1차 대각성 운동이 식민지 전역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했다.
② 감리교의 성립
영국에서 국교회 신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1735년 식민지 선교를 위해 조지아주에 왔었다. 그의 선교는 대각성 운동과는 무관한 것이었으나, 1737년에 별 성과 없이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대각성 운동과 그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 존 웨슬리는 국교회 선교를 위해 신대륙에 갔다가 돌아온 이후에 종교적 열정이 식어졌다. 그때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던 1738년 어느 날 그는 ‘올더스게이트 체험’(Aldersgate Experience)을 통해 깊은 영적 각성을 경험했다.
◆ 이후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조지 휘필드와 함께 경건주의 교회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들에 의해 감리교회가 형성되었다.
◆ 그러나 조지 휘필드는 웨슬리 형제와는 신학적 관점이 달랐으며, 칼빈주의 감리교를 따로 이끌었다.
③ 미국 독립
청교도의 후천년설에 기반한 기독교 국가 건설의 소망이 영국에서는 10여 년의 짧은 꿈으로 끝났지만, 신대륙에서는 그 소망이 오히려 더욱 자라고 있었다. 그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이 영국 왕실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그들은 대륙회의를 조직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을 논의했다. 1776년 13개 식민지 대표가 참석한 대륙회의에서 독립전쟁을 결정하고,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을 선출했다. 그가 지휘한 독립전쟁은 7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1783년 독립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독립군의 승리에는 영국과 대립하던 프랑스의 역할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 미국은 동부 지역의 13개 식민지를 중심으로 연합국 형태로 독립했고, 이후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서부 개척을 통해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 이후 개척지마다 교회가 세워졌으며, 미국의 초기 발전은 청교도의 후천년설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 제2차 대각성 운동(1790-1840)
①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미합중국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 시점에,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의 주도 아래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전개되었다.
② 찰스 피니는 청교도적 신앙을 지닌 미국 장로교 목사로, 현대 부흥 운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③ 유럽 대륙에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도와주었던 프랑스에서 대혁명(1789-1799)이 일어났다. 혁명가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고, 왕정을 폐지했으며, 이신론을 넘어 무신론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성경을 불사르고, 교회를 파괴하는 등 반기독교적 행동을 자행했다. 미국 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반기독교적 사상이 미국 교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지만, 그 영향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 제3차 대각성 운동(1850-1900)
제3차 대각성 운동은 드와이트 L.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운동은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 미합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세계가 기독교적으로 개혁된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후천년설 신앙이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기간 중에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다.
① 세계선교운동: 무디와 아더 피어선(Arthur T. Pierson)의 제안으로 1886년에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학생자원운동(SVM: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 조직되었다. 학생자원운동을 통해 복음은 세계 여러 지역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 이때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조선 말기 고종이 재위하던 1884년에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1885년에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 아더 피어선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던 1910년에 입국하여 제자인 언더우드에게 신학교를 지을 자금을 맡겨 두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갔다가 다시 오지 못하고, 이듬해 소천했다. 그의 자금으로 언더우드는 피어선 기념 신학교를 설립했다.
② 미국에서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1861-1865)이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재임 시절에 발발했다. 링컨이 주도한 북군의 승리로 노예해방이 이뤄졌으며, 이는 인권과 평등사상의 중대한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③ 세대주의 등장
◆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가 1862년 남북전쟁 중이던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해서 세대주의를 전파했다.
◆ 세대주의는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종말론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 다비는 남북전쟁 후에도 1877년까지 총 7회를 방미해서 세대주의 확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세대주의가 등장하면서 다양한 천년왕국론 학설들이 신흥국 미국에 모두 전파되었다.
◆ 감리교와 침례교 등의 새로운 교파와 세대주의의 등장으로 교세 확장 경쟁과 천년왕국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당시에 천년왕국론은 일반적으로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3학설로 분류되었다. 4학설은 신학적 논쟁의 결과로 전천년설을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로 구분하면서 등장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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