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녀야 할 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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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 박사

일반 사회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정신과 생활현장에서의 품성을 보통 3가지로 나눈다. 그것은 인성, 덕성, 지성을 말한다. 상대하고 싶거나 믿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서의 바른 품성을 가진 자는 대략 이 세 가지를 유지하고 있다.

먼저 인성이다. 인성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품성으로서 자연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과의 차이점, 인간다운 면모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근거로서의 품성이 인성인 것이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서 선을 본질로 한 자연적 품성인데, 이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지지하는 인간품성이다. 인간에 대한 모든 평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이 자연적으로 선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해해야 한다.

둘째, 덕성이다. 덕이란 이것 역시 동양에서는 지녀야 할 윤리의 일종으로 보는 반면, 서양에서의 덕은 어떤 “정신적, 사회적 가치”를 말한다. 이것은 지니거나 지켜야 할 필요성으로서의 윤리를 말한다. 동양에서의 덕은 그렇기 때문에 주로 인간 마음의 상태를 근간으로 한 자비, 용서나, 이해, 아량, 도량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서양에서의 덕은 정신이나 사회적 가치 차원에서 이해한다.

좀 자세하게 말해보면, 먼저 덕은 넓은 마음을 말한다. 도량이 넓은, 이해하는, 용서하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를 덕을 가진 자라 말 할 수 있다. 유교에서 공자는 인간의 품성을 하늘개념과 연결하여 가르쳤는데, 하늘의 품성으로서 그는 인(어짐)을 강조했다. 하늘은 항상 인간에 대해 어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하였다. 이와 같이 덕은 인간 품성이 하늘과 같은 존엄한 것에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도덕적 힘이라 말 할 수 있다. 마음을 넓게 쓴다든가, 열어 놓는다든가, 어진 마음을 갖는다든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신적 힘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덕을 가진 자는 자랑을 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덕을 가진 자는 물질적, 인간적 행위, 가문, 학벌, 이런 것을 공정성을 기반으로 하여 조성된 사회에서 하지 않는다. 자랑은 일종의 우월감, 또는 우월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보편타당한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에서는 부덕이 된다. 자랑이 심하면 교만으로 흐르게 된다. 교만은 누구나가 싫어하여 교만한 자도 타인의 교만을 싫어한다. 덕을 가진 자는 오히려 반대로, 사도 바울의 말 처럼,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타인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이해하고, 용서한다. 그러니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지성이다. 지적 품성을 말한다. 이는 꼭 무엇을, 또는 고등학문을 많이 배운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성이란 사실이나 진실을 사랑하는 품성을 말한다. 그리고 교양있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다. 유럽은 중세까지 보통 사람들은 지적 품성을 가질 수 없었다. 너무 기독교라는 교권주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 들어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의 계몽주의(Enlightenment)로 말미암아 지식인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다양한 철학, 인문학이 나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교양을 가진 시민사회가 되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었다. 계몽주의 말 그대로, 지성을 갖춘 품위있는 사고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에도 양화와 악화가 있고, 사회산업자본과 천민자본이 있듯이, 지식에도 세기적 학자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천박한 지식인들이 있다. 천박한 지식인들은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지식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을 내 세우는 기술을 가진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글이나 책을 자랑하는 것은, 그리고 지식을 바탕으로 조그마한 권력같은 것의 어떤 줄을 잡았다고 행세하는 것은 천민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나, 헤겔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하바드대학교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의 이론(Theory of Justice)”이나, 역시 하바드대학교의 사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편(The Clash of Civilization and Remaking of the World order)”, 27세에 그 대학교 교수가 된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 또 시카고대학교의 알란 브룸(Allan Bloom)의 “미국정신의 종말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스탠포드대학교 이안 모리스(Ian Morris)의 “가치관의 탄생” 그리고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와 같은 저술을 내야 한마디 할만하지 않겠는가. 지성인들로서 세기를 꿰뚤어 보는 그들은 얼마나 겸손한지 살펴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는 사회가 갈등과 시끄러움으로 혼란을 겪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품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이 뒤틀려 있으면 동물적 감각이 나타날 것이고, 덕이 없으면 정신적으로 매마른 사회가 될 것이며, 지성이 없으면 잘났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만 살게 되고 아는 체 하는 교만이 판을 쳐 사회는 더 냉소적으로 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행복하고, 질서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본연의 선한 품성이 활성화되고, 너그러움이나 어진 마음으로 도덕적 생활을 해야 하며, 지적 품성으로 진실이나 선을 높여 나가야 한다. 그런 품성을 고루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인성, 덕성, 지성적 인물이 되되, 근본적으로 하나 더 가져야 할 차원 높은 품성이 있다. 영성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품성을 가진 존재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성이 없으면, 그냥 일반 사회적 인성, 덕성, 지성적 인물일 뿐이다. 우리가 영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위 세가지 품성이 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이 인간의 본성, 윤리도덕적 품성, 그리고 지적 품성을 콘트롤하기 때문에 이 영적 품성을 가져야 하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품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물은 역사적 과정에 따라 유유자작하게 흘러 가지만, 이 모든 것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운행의 의도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계성을 가진 인간이 인간다우면 얼마나 인간답게 되고, 덕을 가지면 얼마나 가치있는 덕을, 지식을 가지면 얼마나 아는 존재들일까를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성인 영안에 거하는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삭막한 이 시대, 인성, 덕성, 지성, 그리고 영성을 가지고 인류정신사에 공헌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인간본성적 고백을 했고, 박해하는 자들을 용서하는 덕을 가졌으며, 그리스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영을 강조하여 영이 세계 우주만물에 충만해 있다 했다. 중세의 루터나, 칼빈, 근대의 존 웨슬리도 위 네가지 품성적 요소를 겸비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떤 품성으로 인류역사에 헌신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가 이땅에 오신 것은 인간이 인갑답게 살게 하기위하여 오신 것이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되 이웃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 용서하며 가슴으로 포근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장 15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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