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성령이해가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3)

오피니언·칼럼
기고
성령에 대한 관심 약화 유발 가능성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새로운 성령이해는 일정 부분 기여점을 지닌다. 그러나 약점 또한 지니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약점 가운데 하나는 성령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불러올 수 있는 가능성이라 하겠다. 전통적인 성령 이해에서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성령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약했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책 속에는 성령론에 대해 언급들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성령론은 구원론의 보조적인 기능 즉 구원론을 다룰 때 칭의론과 성화론을 성령의 활동으로 설명하는 정도에 그칠 뿐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런 점을 주목하면서 네덜란드의 개혁자 신학자 벌코프는 그의 유명한 책 『성령론』 서문에서 “성령론은 조직신학에서 무시되고 있었던 영역이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성령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분위기가 새롭게 반전된 것은 오순절의 성령에 대한 강조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순절 운동은 전통적 교회의 영적인 무관심을 공격하면서 성령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점들이 성령의 폭발적인 능력을 재발견하도록 도전하였던 것이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 운동은 왜 많은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을까?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는 것은 왜 에큐메니칼 성령이해가 성령에 대한 관심의 약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오순절에서 말하는 성령은 민초들의 삶에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는 분으로 나타난다. 즉 오순절에서 성령은 교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질병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고 기타 다양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해결해주시는 영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처럼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결해 볼 수 없는 삶의 처절한 문제들을 성령께서 실제적으로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가르치므로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추구하게 된다. 반면에 에큐메니칼에서 가르치는 성령이해에 의하면 성령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복을 주시는 분이라기 보다는 세계의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태계 보존을 위해 사람들을 도전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합리적이고 신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삶의 질곡 속에서 헤메이며 살아가는 민초들의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지 않는 말이 될 수 있다. 즉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우선 급한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발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고 강조하면 본성상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에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열심히 세계 변혁을 주도하는 성령에 대하여 외치지만, 그러한 성령 이해는 성도들의 삶을 터치하는 성령 이해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며 종국적으로 성령에 대한 관심 자체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둘째, 오순절에서 가르치는 성령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고 있다. 그들은 오늘날도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으며 실제로 그런 체험을 종종 한다. 그래서 오순절 교회들은 기적과 신유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갈망 때문에 실제적으로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유의 역사가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차원을 지닌다. 신앙이 만약 합리적인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윤리의 차원으로 전락될 수 있고, 종국에 가서는 과학이 신앙을 대치하게 될 수 있다. 즉 신앙이 초자연적인 차원을 상실하게 되면 신앙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은 자꾸 줄어들 것이고, 결국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게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초자연적인 차원의 성령이해를 회복해야 하는데, 오순절주의자들의 공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차원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설교했고, 이러한 설교는 좌절과 절망의 한 가운데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희망을 갖도록 만들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에큐메니칼에서 가르치는 성령 이해에는 초자연적인 차원의 성령 이해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정의, 평화, 샬롬, 생태보존 등을 이루어가시면서 사람들을 그 일에 동참시키는 분으로 이해되는 반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민초들의 당면한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에 대한 강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열망하는데, 에큐메니칼 성령 이해에는 그런 차원이 약하고, 그러기에 성령을 사모하고 추구할 이유를 별로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셋째, 오순절의 성령 이해에 의하면 성령은 무언가를 주시는 분이시다. 능력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병 고침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을 사모하고 간절히 추구하면 놀라운 은혜와 축복들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에서 가르치는 성령이해에 의하면 성령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참여케 하시는 영이시다. 오순절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무엇을 주기보다는 요구하시는 영이시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영이시다.

그런데 희생과 헌신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이 먼저 주어져야 한다. 즉 헌신과 희생을 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요구만을 하는 것은 결국 자동차 기어를 중립에 놓고 엑셀을 밟는 것과 같이 공회전으로 끝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에큐메니칼의 성령이해는 매우 폭이 넓고 이론적으로도 매우 설득력이 있는 성령이해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해이지만, 실제 민초들이 힘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차원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성령에 대한 관심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좀 더 자세한 내용과 각주 등은 아래의 책에 나와 있다.

현대선교신학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선교와 신학』 및 『복음과 선교』 편집위원, 지구촌선교연구원 원장, 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등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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