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die Freude
환희의 송가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Tochter aus Elysium,
낙원(엘리시움)의 딸이여,
Wir betreten feuertrunken,
우리 모두 황홀 속에서
Himmlische, dein Heiligthum.
빛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Deine Zauber binden wieder,
신성한 그대의 힘은
Was der Mode Schwerd getheilt.
세상의 칼날(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것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모든 인간이 형제가 되노라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네 온화한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는.
Seid umschlungen, Millionen!
서로 껴안아라! 만인이여
Diesen Kuß der ganzen Welt!
이 입맞춤을 온 세상에!
Brüder, überm Sternenzelt
형제여, 별이 빛나는 장막 저편에
Muß ein lieber Vater wohnen!
사랑하는 아버지가 반드시 거하시리라!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참 된 친구를 얻은 자여,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사랑스러운 아내를 얻은 자여,
Mische seinen Jubel ein!
다 함께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Ja, wer auch nur eine Seele
그렇다, 비록 단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땅 위의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그런데 그 조차 가지지 못한 자들은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눈물 속에 이 모임을 떠나야 하리라!
※찬송가에도 활용되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일명 합창교향곡) 4악장(환희의 송가)의 합창 부분은 유럽연합(EU)의 국가가 된다. 다만 공식적인 가사는 없다. 독일의 경우 기존에 써왔던 대로 독일이 사랑하는 시인 실러의 독일어 가사(통일 전 서독의 애국가 가사)를 붙여 사용하며, 라틴어 가사도 있다.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Ode to Joy)는 1785년에 완성되어 1786년에 출판되었다. 반전제적 인물이었던 실러는 본래 이 시를 '자유(Freiheit)'의 송가로 기획하였으나 당시의 검열과 억압적 사회 분위기 속에 '환희(Freude)'로 바꾸었다는 역사적 논쟁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실러 시의 경우 문자적 해석보다 그 메타포를 잘 이해해야 한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작품이 초기 작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 어떤 부분이 첨삭되었는지 실러의 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실러의 사망 이후, 1808년 재출판된 판본에서는 몇 개 줄이 수정되고 한 절이 통째로 삭제되기도 했다.
1824년 작곡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에 실러의 환희의 송가(1808년 판본)가 삽입된다. 다만 베토벤은 실러의 시를 그대로 쓰지 않고, 1/3 정도만 추린 이후에 곡의 자연스런 흐름을 위해 실러의 시에는 없던 별도 도입부 가사를 추가했다. 위에 소개된 시는 시 전체가 아닌 바로 이 부분만 수록하고 있다.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독일도 동상의 문화가 있다. 비스마르크,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유럽 금속활자의 원조인 마인츠의 구텐베르크 그리고 실러와 괴테 등의 동상이 많이 눈에 띤다. 독일 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동상을 통해 그 중에서도 루터와 괴테와 실러가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인물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루터 동상이 주로 독일 북·동부와 남부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괴테와 실러 동상은 전국적이다. 심지어 독일에는 괴테와 실러의 이름이 들어간 거리나 공원도 허다하다.
그럼 왜 그 유명한 詩요 노래인 세계적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로렐라이'의 작가 하이네는 독일인들이 외면할까? 실러 희곡 속 주인공들이 용감하고 자기 희생의 독일적 영웅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반면 하이네는 유대인으로 독일인들의 가식과 냉랭함을 신랄한 풍자와 반어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독일인들이 마음으로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는 독일 뷔르템베르크 주 마르바흐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용감한 아들 '발터'의 머리 위에 올려진 사과를 맞춘 명 사수 '빌헬름 텔'('윌리엄 텔') 동화로 잘 알려진 실러는 독일의 시인이자 고전주의 극작가, 철학자, 역사가, 문학이론가였다. 군의관 아들로 신앙심이 깊어 본래 목사가 되려했던 실러는 뷔르템베르크 주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으나 전공을 의학으로 바꾸어 아버지처럼 군의관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당시 독일의 영주 관할 시절의 억압적 체제의 결과였다.
슈트트가르트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연극을 위한 희곡 <도둑들>을 만하임 극장에서 최초 공연하며 큰 호응을 받는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진정한 용기를 다룬 이 작품은 영주의 분노를 사게 되면서 실러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만하임을 탈출한 실러는 가난과 문학적 열정의 길로 드러서며 위대한 창작품들을 쏟아냈다.
©조덕영
1787년 독일 문단의 중심지였던 바이마르로 이주한 실러는 다양한 인물들과 교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실러를 바이마르로 부른 사람은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독일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였다. 10살 차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는 등 문학사에 보기 드믄 우정을 나눈다.
"독일?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습니다."
1796년, 괴테와 실러의 공동 시집『크세니엔Xenien』에 등장하는 질문이다. 그만큼 독일이 단순한 역사를 가진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자신이 유아세례를 받았던 교회가 있던 바이마르 공국의 여러 공직을 맡게 된 괴테는 실러뿐 아니라 <질풍노도>의 사상가요 신학자요 목사였던 헤르더도 바이마르로 불러 바이마르의 교회 담임을 맡긴다. 18세기 바이마르에서의 독일 세 천재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괴테가 부른 두 사람 헤르더와 실러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헤르더가 사망한 후 2년 후 실러도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괴테는 그 슬픔을 글로 남기고 있다.
젊은 시절 가난으로 얻은 폐결핵의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시와 희곡 등을 써 나간 실러는 죽기 한 해 전인 1804년 그 유명한 <빌헬름 텔>을 완성한다. 그리고 1804년 3월 17일 바이마르에서 처음 공연이 된다. 46세의 나이로 바이마르에서 숨을 거둔 실러는 절친 괴테와 나란히 바이마르에 묻혀 있다.
진정한 자유와 용기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정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영주(領主)의 압제 속 군의관에서 스스로 가난한 문학의 길로 들어섰던 목사가 되고 싶었던 실러! 이제 우리 문단에도 괴테와 실러 같은 아름다운 동행의 서사와 존경받는 인물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