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 4. 룻, 들에 핀 꽃이 되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룻 2:14-23
이희우 목사

이해인 시인은 ‘6월의 장미’라는 시의 시작을 이렇게 썼다.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시인은 “6월의 장미가 말을 건네온다”며 그 장미가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6월”이라 했다. 그리고 “삶의 길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찌르는 가시, 그 가시로 찌르고 또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 사회는 가시 돋힌 말들을 쏟아내고, 사사건건 충돌하는 모습이 마치 바람이 불 때마다 가시로 찌르고 또 찌르는 장미나무 가시 같다. 부디 금년 장미는 예년보다 더 예쁘고 쌈박하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오늘이 너무 힘겨운데 내일에 대한 전망마저 불투명하지만 누구든 마음만 잘 추스르면 눈부신 계절이다. 한적한 산천의 둘레길이나, 분주한 도심의 가로수, 무심했던 콘크리트 틈새마저 푸르른 생명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싱그러운 봄이다. 우리 마음속에도 나를 향해 펼쳐주신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웃음꽃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룻기』를 읽다가 문득 룻은 ‘찔레꽃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꽃’으로 불리기도 하는 야생장미 찔레꽃이 배고픔과 어머니,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산골에 병든 아버지와 '찔레'와 '달래'라는 자매가 있었는데 어느 날 공녀로 몽골에 끌려가게 된 찔레가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겨우 돌아오지만, 흩어진 가족들을 찾을 수 없자 찔레는 상심하다 죽게 되고 그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찔레꽃이라는 전설이 있다. 고독과 슬픔, 가족에 대한 그리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하는 꽃, 장내 독소를 제거하고, 위장 기능을 강화하고, 항염‧항암 효능이 뛰어난 약용식물이다. 꽃잎 모양은 작고 수수하지만 장미의 진한 향내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 꽃, 그래서 룻을 ‘찔레꽃 인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어느 날 이팝나무를 보며 룻을 생각했다. 훤칠한 키와 풍성한 가지 사이에 여러 이야기를 수놓은 듯한 이팝나무, 하얀 꽃들이 마치 성경에서 말한 배고픈 이들을 위해 하늘에서 흩뿌려 주는 ‘만나’(מָן) 같았기 때문이다. 만나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특별 제공하신 식용 가능한 물질, 가나안 정복 이전까지 40년간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특별하게 공급해 주신 생명의 떡이다. 먼 객지로 떠나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빚은 어머니의 ‘한고봉 쌀밥’ 같은 이팝나무, 앵벌이처럼 구걸하는 신세라 장미넝쿨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룻이 이팝나무가 길 양편에 가득한 가로수 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비록 개망초 흰 꽃무리 핀 들녘이나, 쑥국새 뻐꾸기 노래하는 숲은 아니더라도 10년 만에 찾아온 풍년을 맞아 열심히 추수하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이 너무 행복하고 정겨운 베들레헴 들판, 단연 돋보이는 꽃이 룻이다. 룻을 ‘들에 핀 꽃’이라고 부르고 싶다. 누구보다도 절박한 처지에서 예상치 못한 뜻밖의 너무 큰 은혜를 입은 룻이 활짝 웃고 있기 때문이다.

환대

당시는 보통 15~16세에 결혼했으니 혼자되었어도 아직 20대일 것 같은 어린 룻, 이삭 주우러 들로 나갔다가 들에 핀 꽃이 된다. 그것도 가장 예쁘게 활짝 핀 꽃, 보아스의 환대 덕분이다. 보아스의 환대는 무엇보다 룻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모압 사람이라는 거부감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대할 수도 있던 시절, 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룻을 칭찬했고(룻2:7), 고결한 인품으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룻2:11). 또 아직 읽지 않았지만 “꽃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덕은 만 년 동안 향기롭다”는 말 그대로 동네 사람 모두가 다 룻의 사람됨을 극찬한다(룻4:15). 칭찬이 중요하다.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칭찬하는 것 역시 중요한 것, 기왕이면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구체적으로 칭찬하고, 적극적으로 칭찬하며 살면 좋겠다.

절망과 배고픔으로 집을 나섰던 룻이 보아스의 환대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 팔자를 고칠 만한 상황을 맞는다. 이해인 수녀가 ‘6월의 시’에서, “하늘에도 땅에도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라는 표현을 썼는데 룻에게 보아스는 마치 장미넝쿨을 만들어준 사람 같다. 넝쿨장미가 “밝아져라” “맑아져라” 응원하듯 룻에게 힘을 실어주는 멋진 보아스, 그의 환대에 넝쿨장미들이 활짝 핀 아름다운 장미꽃 터널을 걷는 듯한 룻의 가벼워진 발걸음이 그려진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아스의 환대는 먹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와서 떡을 먹으라,” 빵을 주는데 “떡 조각을 초에 찍어 먹으라,” 신포도주와 함께 먹도록 배려한다. 또 볶은 곡식도 주는데 룻이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 이건 동냥하는 사람에게 주는 밥이 아니고, 눈칫밥과는 거리가 멀다. 실컷 먹고도 남았다. 2장 18절에서도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라고 했는데 두 과부가 그동안 얼마나 주리며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잘 대접한 식사 한 끼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환대’일 수 있다는 거다. 누군가 그런 환대를 베풀면 고작 한 끼로 여기지 말고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환대로 여기면 어떨까?

잰틀한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데 가지 말고 내 밭에서 이삭을 줍되, 곡식을 추수하는 바로 옆에서 주우라”고 한다. 이삭 줍는 것도 자리가 중요한데 ‘추수하는 바로 옆자리’, 파격적인 특혜다. 게다가 일꾼들에게 조금씩 알곡을 흘려서 룻이 더 많이 줍게 하라고 한 것, 이 어른이 젊은 처자에게 완전히 반하셨는지 일부러 주울 이삭을 만들어주라고 특별 지시를 한다.

그 특혜의 결과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었다(2:17). 아마 15~27kg, 1/4 가마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두 명이 1주일 정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굉장한 양, 특별 대우에 성실함이 더해진 예상치 못했던 대단한 결과다. 만일 “저 어른이 나한테 반했나 보다” 그러며 꼬리나 쳤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쫓겨나고 맞아 죽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실한 룻이었기에 보아스는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하고, 소년들이 못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안전까지 보장해준다. 끝내주는 일자리, 이 정도면 어디에도 없는 호의, 대박이다. 한동안의 먹거리 해결 정도가 아니라 이방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파격적인 조치, 이고 가는 몸은 피곤했을지 몰라도 마음은 날아갈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모습이 마치 “나 좀 보라”고 들에 활짝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다.

하지만 이건 1차적인 환대에 불과하다.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아직 환대는 시작일 뿐, 본론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구약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한 사건이 나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방문하신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위해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 집을 지나가시는데 그때 마므리 상수리나무에 있는 손님들을 본 아브라함이 극진히 환대한다(창18:2,4). 그리고 이어서 가루 서 말로 떡을 만들고 송아지 요리까지 대접한다. 초대받고 오는 손님들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극진히 모신 것, 성경은 그때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천사들을 대접했다고 평가한다(히13:2).

아브라함의 이 환대의 대가가 엄청나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이삭의 탄생 소식을 듣는 것이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꿈 같은 말씀, 나이가 몇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기에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까지 듣게 된다.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그러시며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비밀 계획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멸망의 도시에서 조카 롯을 구할 수 있었다. 기억하라. 환대는 축복이다. 상대방에게 축복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축복이다.

은혜

성경은 보아스의 이 환대를 통해 독자들을 ‘은혜’로 이끈다. 2장 2절에서 룻은 밭으로 나가며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그런다. 일반인들은 이럴 때 통상 ‘은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재수 좋으면 또는 운이 좋으면 그러지만 성경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한다. 이어지는 10절에서도 또 ‘은혜’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방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룻은 기대대로 은혜를 입었다. 보아스의 환대를 은혜로 안 것, 당연한 표현이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입고도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를 보라. 동방예의지국은커녕 동방무례지국, 배은망덕까지 흔한 세상 아닌가?

룻이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 보아스는 어떤 사람인가? 살몬의 아들이자 엘리멜렉의 친족이며 베들레헴의 부유한 지주이다. 그는 당시 자식 없이 죽은 형제의 대를 이어주기 위해 형제 순으로 미망인과 결혼하여 죽은 형제의 기업을 이를 자를 낳게 해주는 계대결혼(繼代結婚)이나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갈 경우 가까운 친척이 대신 빚을 갚아주거나 가난해서 토지를 팔았을 때 토지 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아 토지를 돌려받게 하는 고엘제도가 있었는데 보아스는 과부된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 집안의 대를 이어줌으로써 고엘, 즉 기업 무를 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했다.

룻과 결혼하고 낳은 아들이 오벳이고, 그 오벳은 다윗의 조부였으니 결국 룻과 함께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룻기에 보아스의 이름이 25번 나오고, 인칭 대명사 ‘그’라는 표현도 25번, 총 50번이나 나온다. 보아스가 룻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었던 셈이다. 만일 관대함과 자상함, 배려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존중하는 자세가 돋보이는 보아스가 없었다면 나오미와 룻은 이름도 없이 사라진 불쌍한 과부들일 뿐이다.

그리고 또 성경을 읽어보면 룻만 보아스를 통해 은혜받은 것이 아니다. 보아스도 룻으로 인해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책임지는 사랑의 사람 보아스의 이름을 빛나게 하신 것이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 룻기에 4번 나오는데 다 2장에만 나오는 2장의 핵심 단어이자 룻기의 중요한 윤리가 된다. 반드시 기억하면 좋겠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보아스가 룻의 고엘(גאל), 구원자(redeemer)가 되었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엘, 구원자가 되신다. 룻이 그 은혜로 말미암아 들에 핀 꽃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은혜로 말미암아 5월이든 6월이든 활짝 핀 꽃이 되어야 한다.

청혼(1)

룻은 보아스의 1차적 환대에 땡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오미의 코치를 받아 가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말씀은 이제 룻과 나오미의 작전이랄까? 청혼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장기적인 생존 대책을 위한 계략, 두 과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데 우연히(?) 잡은 인생 역전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래서 꾸민 것이 일명 ‘청혼 프로젝트’, 룻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후 주워온 이삭을 보고 단순한 이삭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오미는 자초지종을 듣고, 이건 ‘이삭’이 아니라 ‘추수’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룻에게 생각도 못했던 희망을 심어준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룻2;20), 농장 주인 보아스가 우리 가정을 세워줄 구속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며느리 잘되는 것을 샘내는 시어머니도 많은데 정말 본받을 만한 훌륭한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이 말씀 가운데 ‘기업을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 구원자라는 말이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 구원자로 여겼다. 그래서 구체적인 코치를 시작한다.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2:22), 보아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현숙한 여인’이 되라는 뜻, 앞으로 처신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2장 21절과 23절의 ‘가까이 있으라’라는 표현,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ק)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1장 14절에서 룻이 시어머니를 ‘붙좇았다’라고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단어, “딱 달라붙어 있으라”는 말인데 21절과 23절에도 나온다. 21절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이고, 23절은 나오미가 룻에게 한 말, 말이 다르다. 보아스는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했고, 나오미는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했다. 보아스가 룻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말했다면 나오미는 보아스의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남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여자애들한테만 바짝 붙어있으라고 한 것이다. 그날부터 룻은 ‘다바크의 여인’이 된다.

또 주목할 것은 “내 딸아”라고 부른 것이다. 이 표현이 룻기에 8번이나 나온다. 세 번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 표현이고, 다섯 번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한 표현이다.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나오미가 자신의 운명을 전환시킬 미래가 도래함을 직감하고 마치 친정엄마처럼 친히 청혼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ager)가 된다. 그 구체적인 프로젝트는 다음 장에서 나눌 것이다. 기대하시라. 19금이 될 수도 있는 더욱 흥미진진한 3장 개봉 박두!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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