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계시록>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에 낯선 사내가 찾아옵니다. 등록을 권유하던 젊은 목사는 그의 발목에 채워진 전자발찌를 보고 당황하죠. 곧 여중생 신도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목사는 그를 범인으로 확신한 채 쫓기 시작합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과거에 그 사내의 성범죄로 동생을 잃고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중으로, 사적 복수심과 경찰로서의 정의감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사내를 처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라 믿고 결행하려는 목사와, 그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형사, 그리고 흉악스러운 사내가 뒤얽히며 파국이 찾아옵니다.
뒤틀린 믿음이 불러온 광기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목사는 사내를 범인으로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사내와 얽힐 때마다 나타나는 자연 속 모양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여김으로써 더욱 단단해지죠. 목사는 우연히 떨어진 물방울 때문에 일그러진 사내의 사진에서 악마의 형상을 보려 합니다. 유괴범을 처형하도록 규정했던 신명기 구절은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계시로 받아들이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목사의 ‘믿음’은 광기로 변해 사내를 향한 사적 제재로 이어집니다. 사내를 처단하라는 계시에 순종해야 한다며 단죄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 어그러진 믿음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하고 어디까지 가게 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죠. 사내를 향한 형사의 집요한 추적은 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를 동력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목사의 왜곡된 믿음과 기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맹신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전작들에서도 왜곡된 신념이 빚어낸 파멸을 그려낸 바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붙들린 광신도들의 추악한 탐욕은 <사이비>(2013)에서, 어떠한 현상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다가 올무에 걸리는 인간군상들은 <지옥 2>(2024)에서 담아낸 바 있죠. 이는 다른 창작자들도 마찬가지여서, 공포영화의 방식으로 정신분열적 사회를 그려냈던 <불신지옥>(2009), 소위 ‘확증 편향’의 문제를 스릴러의 외양으로 보여준 <설계자>(2024)등은 잘못된 믿음이 불러온 비극을 다룬 예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이러한 창작물들이 대체로 기독교(또는 유사 기독교)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데요. 그만큼 기독교가 이제껏 세상에 보여준 ‘믿음’이 괴상해 보이거나, 아니면 그 믿음의 단면이 혼란스러운 현대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다원주의적 가치관이 대세인 현대사회에서 믿음이란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한편으로는 무의미한 현상들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리를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기독교의 민낯
짓궂게도 영화는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는 기독교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목사의 아내는 외도를 하고, 대형교회 목사는 세습을 위해 아들의 과오를 무마하려 듭니다. 작은 개척교회에 헌신하고 있는 주인공 또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자리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죠. 신도들은 실종된 소녀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기도하지만, 정작 소녀 부모의 고통스러운 심경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사모들이 치러내는 요양원 봉사는 진정성이 의심스럽죠. 이렇듯 불완전한 인간들이 믿음이라는 기치 아래 뒤엉켜 있는 영화 속 장면들이란 몹시 민망하지만 기독교의 민낯임을 부인할 수 없을뿐더러, 온전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사유하게 합니다.
믿음이란
영화 속 맹신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그릇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과 가르침을 목도하고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에 눈이 멀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유대 민중들도 마찬가지여서, 예수님을 그저 기적 일으키는 능력자나 정치적 지도자 정도로 여겼을 뿐이죠. 이들 모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다는 점에서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영화 속 목사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 믿음에는 필시 욕망이나 이기심이 혼입되었겠지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지면에서 믿음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핵심은 이것이 아닐런지요. ‘세상이 원하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릴 수 있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믿음을 지닌 이라면, 뒤틀리고 어그러진 신념조차 열정으로 포장되어 버리는 작금의 세태를 거스르는 참 성도일 겁니다.
안타깝게도 영화 속 뒤틀린 믿음이 빚어내는 광기와 파멸의 모습에는 혼란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가 투영되어 보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믿음이 순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간의 극단적 대립이 일상이 되어 버린 요즈음, 영화 <계시록>은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묵직한 화두를 던져줍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