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목사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립”

사회
교육·학술·종교
노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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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여론조사서 당시 국민의 78%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 원해’”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맨 오른쪽)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모습.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두레마을공동체 대표 김진홍 목사가 최근 ‘이승만의 건국전쟁’이라는 제목의 ‘아침묵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 4가지를 설명했다. 그는 지난 1일 개봉된 이승만 대통령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감독 김덕영)을 인용해 이 같이 전했다. 이 영화는 7일 기준 누적 관객수 6만 3천명을 기록해 박스오피스 3위를 달리고 있다. 이번 기사는 김 목사가 밝힌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 4가지 중 2가지를 먼저 전한다.

김 목사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요즘 들어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런 현상이다. 나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공과(功過)가 7대 3이라 인식한다. 초대 대통령으로 재임 중에 잘한 공이 7이고 잘못한 과가 3이란 것”이라고 했다.

이어 “첫째는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최고의 업적”이라며 “1945년 해방 정국에서 국민 다수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체제를 선호했다. 그 당시 미군정 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새로 시작되는 정부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78%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를 선호했다’는 자료가 있다”고 했다.

이어 “그런 시대에 유독 이승만 박사는 고집스레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민족의 살길임을 주창하여 그 덕으로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 아래 살 수 있게 됐다”며 “그리하여 ‘북’은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하고 ‘남’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해, ‘남’이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아가 다가오는 통일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된다면 우리 겨레는 단군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될 것” 라며 “둘째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업적으로 6.25 전쟁에 나라를 지킬 수 있게 하였던 공로“라고 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12만 명의 북한군이 일거에 남침을 하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면전 발발의 보고가 전했던 시간은 10시 경”이라며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먼저 ‘나에게 한 시간을 주라’고 한 후 기도실로 들어가 1 시간 동안 기도드린 후 미국 대사 ‘무쵸’를 부르라 일렀다”고 했다.

그러면서 “6.25 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는 남한에서는 전쟁할 준비가 돼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꼭두각시인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앞세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했다”며 “(소련은) 북한 인민군에게 소련제 탱크 244대나 물려주고 일본군이 만주에 버리고 간 무기들을 인민군에게 줘 훈련시켰다”고 했다.

아울러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중국 대륙을 놓고 다투던 때에 모택동 군에 소속되어 있던 8로군 5만 명을 인민군에 그대로 편입시켰다. 그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이었다. 그래서 6.25 전쟁이 시작된 당시 인민군의 군세는 12만 명을 넘었다”며 “그러나 남한군에는 탱크 한 대도 없고 무기가 태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일성은 전쟁을 시작하면서 일주일이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노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인민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국군이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전쟁에서 나라가 무너지지 아니하고 지켜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며 “외교에 천재란 별명까지 붙은 이승만 대통령은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전선을 시찰케 했다. 그리고 미국의 조야를 움직이고 유엔을 움직여 공산 침략을 막아내는 전쟁에 참여케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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