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전히 복음화가 선교의 핵심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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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교수, 선교신학)

선교의 핵심 목표인 복음화 :
복음화와 인간화를 동등한 목표로 생각하는 통전적 선교가 과연 답일까?

I. 들어가는 말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복음화는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선교를 수행해오면서 가장 분명한 선교의 한 목표였다. 적어도 20세기에 들어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로 제시하기 전까지는 선교의 목표를 ‘복음화’로 제시하는 것에 대한 이의제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기독교의 출발점이신 성자 예수께서 명하신 ‘지상 대위임령’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하셨고,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마 28:19) 라고 명하셨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복음화’라 할 수 있고, 마가복음에 나타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복음전도라고 할 수 있는데, 복음전도는 선교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복음화는 선교의 목표라고 할 수 있지만, 둘 다 선교의 목표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목표의 입장에서 볼 때 엄밀히 구분해보면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는 선교의 1차 단계의 목표이고, 그 전해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한 지역 또는 사회가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복음화는 선교의 2차 단계의 목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 상황에서는 복음화와 복음전도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도 이 두 단어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전통적 선교의 목표인 복음화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진영이 제기하는 비판들을 살펴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화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들을 분석할 것이다.

II. 복음화 중심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문제제기

1. 온정주의와 우월의식

선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의 확장과 연관성을 지닌다. 즉 한 종교가 진리라고 믿는 신앙을 전파하여 그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는 일이 선교의 핵심이다. 기독교가 2천 년 전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성도들의 피 흘린 선교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선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와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복음화’인 것이다. 즉 선교와 복음전도는 그 규모와 방식 등의 차이가 분명 있지만 목표에 있어서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948년에 탄생된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협의회, 에큐메니칼 진영 등으로 표현됨)는 선교를 전통적인 의미의 복음화로 보기 보다는 온 세계를 평화롭고 행복한 곳으로 만드는 인간화와 샬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복음전도를 상당히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에큐메니칼 진영이 전도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큐메니칼 문서들에 보면 전도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에큐메니칼 관점이 섞여서 나타난다. 그래서 언뜻 보면 에큐메니칼 진영도 전도를 중시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은 온 세상의 샬롬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므로 이런 샬롬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전도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관점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어떤 관점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전통적인 복음전도 중심의 선교에 대하여 가장 먼저 제기된 비판은 온정주의와 우월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함께 생명을 향하여” 문서는 “과거와 현재에 선교에 사용되고 있는 주요한 표현들은 주로 사회의 주변부 사람들을 향해 사용되었다. 그 표현들은 일반적으로 주변부 사람들을 선교 활동의 적극적 행위자가 아니라 수혜자로 보았다.”라고 평가한 후 “주류에서 출발하는 선교는 온정주의적 태도와 우월의식이 동기로 작용했다.”라고 덧붙인다. 이 주장에 의하면 전통적인 선교는 선교 대상자를 주변부 사람과 특별한 혜택을 받는 수혜자로 보면서 우월 의식 가운데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지적은 나름 일리가 있는 평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선교나 전도를 수행할 때 온정주의와 우월의식을 가지고 상대방을 얕보는 자세로 선교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분명 복음을 가리는 잘못된 태도가 될 것이다. 선교사와 전도자가 반드시 피해야 할 좋지 않은 태도이다. 하지만 과거 선교사들이 과연 모두 이런 온정주의와 우월의식에 사로 잡혔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더 발달된 서구 문명 속에 살던 선교사들이 낙후된 선교지에 와서 사역을 진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우월의식을 가졌던 선교사들이 소수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같아지려는 성육신적 노력을 하였고, 이런 노력을 통하여 현지에 복음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상황이 좋아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과 연관하여 이원규는 기독교가 아시아의 변화에 기여한 바를 “기독교는 전통적인 문화와 협동적 구조가 쇠퇴하면서,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시기에, 믿을만한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앙은 실용적이며, 정신적 육체적 구제의 한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아울러 불쌍한 선교지 사람들을 보면서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복음전도 중심의 선교를 모두 싸잡아서 우월의식과 온정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전도 중심의 전통적인 선교를 지나치게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게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배타성

에큐메니칼 진영은 기본적으로 온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중시한다. 평화와 공존에 깊은 관심을 갖기에 타종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긍정적 자세를 가지려고 애쓰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으로 인하여 “함께 생명을 향하여” 선교 문서는 “하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그곳에 계시기에(행 17장),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을 운반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다양한 영성들 안에 고유한 가치와 지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신빙성 있는 선교는 ‘다른 사람’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선교의 동반자로 만든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전도나 선교를 할 때 그 대상들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선교의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전도해야 할 대상이 오히려 전도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에큐메니칼 진영이 말하는 선교는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받게 하는 전도이기 보다는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종교 같은 것은 서로 논하지 말고 그냥 세상을 잘 살게 만드는 일에 힘을 쏟자는 말이 될 것이다. 한국일은 다원주의 사회의 특징에 대하여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특정 종교입장의 궁극적 신념이나 진리를 언급하는 것은 무식하고, 교만하고, 독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분석하는데,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다원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종교다원주의의 특징에 대하여 한국일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오늘의 세계 현실이 직면하고 있는 종교간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고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할 것을 강조하며 종교간 공통점을 발견하고 차이점은 서로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종교인들에게 회심이나 개종을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며 다만 대화를 통해 서로가 자신의 종교에 더 충실하며 결과적으로 모두가 더 풍요로운 종교생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복음전도와 선교를 불필요한 것으로, 오늘의 세계 현실에 부적합한 행위로 간주된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종교다원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살며시 감추면서 모호한 말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이 분명히 존재하며 위에서 언급된 특징들이 에큐메니칼 문서들에는 묻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가진 에큐메니칼 진영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복음전도는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구원의 진리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강한 ‘배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전도란 기본적으로 내게 주어진 구원을 상대에게도 전하고 싶은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도는 기본적으로 상대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상대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전도는 불필요한 것이 된다.

즉 전도는 기본적으로 배타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배타성은 교회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주신 것이다. 주께서는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시면서 “... 너희는 온 천하게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명하셨다. 교회가 주님을 머리로 모시려면 배타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포기한다면 주님을 머리로 모시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세를 보이는 것은 전도에 분명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저히 겸손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윤리성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양보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배타성이라는 부정적인 딱지를 붙이는 순간 성도들의 구령 열정은 심각하게 타격을 입게 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물량주의와 개종 강요

협의회는 개종강요와 연관하여 “폭력적인 수단, 경제적인 이익 제공, 혹은 권력 남용을 통해 이루어진 개종은 복음의 메시지와 반대된다.”라고 언급한다. 또 “우리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폭력적 수단이나 권력의 악용을 통해 ‘개종’을 강요했기 때문에 때때로 전도가 왜곡되었고 그 신뢰성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도 말한다. 아울러 “오늘날 세계는 공동체들을 치유하고 양육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괴하고 잔인하게 대하는 종교적 정체성들과 신념들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개종(proselytism)이 전도를 실행하는 합법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말하면서 개종강요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아울러 개종을 지나치게 수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거나 개종을 위하여 물질을 미끼로 제공하는 것도 지적한다. 이원규는 이런 문제점에 대하여 “선교를 전도로만 이해하게 되면 성공의 척도는 가시적인 숫자와 물량에 두게 된다. 따라서 물량주의가 지배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진다.”라고 말하면서, 사회 자체가 물질 만능주의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탕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교회마저 “....교회의 성공 척도, 교인이 신앙 척도가 모두 물질적인 용어로 설명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 하겠다.”라고 지적한다. 협의회의 이러한 지적은 분명 경청해야 할 문제이다. 전도를 위해 지나치게 물질공세를 하고,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자세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고 교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개종강요나 물량주의 등의 용어가 가져다줄 수 있는 부작용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협의회는 개종강요금지 주장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선교란 “다른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긍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고(참조. 막 10: 45, 마 25: 45) 착취나 어떤 형태의 미끼 사용도 없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협의회는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선교를 지나치게 한쪽 면에서만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섬기고 긍정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커피 한잔 권하는 것 같은 자세로 전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커피라면 마시든 안 마시든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므로 강하게 권면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복음은 상대의 영원한 삶을 결정짓는 문제이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큰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손님들이 안 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기 보다는 “...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 23)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을 보건대 협의회는 개종강요금지를 강조하면서 예수께서 사람들을 존중하고 수용한 측면만 애써 강조하는 반면, 강권하여서라도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을 온전하게 이해한 것이 아니며, 자칫 전도를 개종강요로 인식시키면서 전도의 열정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사회이므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강요나 억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기독교 선교에서 개종강요 같은 것은 일어날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이것을 계속 강조하면서 오히려 전도의 열정을 아예 식혀버리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개종강요금지와 같은 부정적인 프레임을 쓰기 보다는 전도 시의 예절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 협의회는 ‘미끼’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전도하면서 주는 사랑과 봉사를 미끼라는 아주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운다. ‘미끼’라는 표현은 낚시를 할 때 물고기를 잡기 위해 쓰듯이 미끼를 주는 사람이 무언가 이익을 얻고 그 대상은 큰 손해를 볼 때 쓸 수 있는 용어다. 그렇다면 전도를 할 때 전도하는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전도 대상자는 큰 손해를 보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전도하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많은 희생을 하고, 전도 대상자는 전도를 통해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선물을 받는 것이다.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사랑을 주는 행위를 미끼로 표현하는 협의회는 전도의 중요성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전도란 그저 미끼를 주어 사람을 낚는 행위로 인식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이런 신학적 관점은 숭고한 전도의 열정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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