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회개한 자의 특성-거룩한 근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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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나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1. 회개의 특권

갈수록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요구하는 ‘회개’의 가치가 타락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중대한 죄를 짓고서도 “나는 하나님에게 회개했으므로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세상 앞에서 고개를 들고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위선적인 교인은 주일에 교회당에 나와서 형식적인 회개 기도를 한 다음 스스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돌아갑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이 ‘회개’를 싸구려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회개’는 물품을 사고파는 화폐이거나 어떤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잘못을 해 놓고 그것의 중대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무심하고 매정한 태도로 “나는 회개합니다.”라고 입술의 고백을 드리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영화 <밀양>이 생각납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감독의 철저한 의도에 따라 반기독교적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한 여자의 아들을 무참히 살해한 범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픔을 잊기 위해 교회를 찾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아픔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다 여인은 목사님의 설교에 감흥을 받고 ‘용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감옥으로 찾아가 범인을 면회합니다. 그런데 범인은 미안한 표정 하나 없이 자신은 이제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인은 순간 허탈감과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낍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 전단지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으로 마감됩니다. 이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싸구려 회개, 값싼 용서와 구원이 얼마나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인가, 얼마나 기독교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풍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펠라기우스라는 영국의 수도사 한 사람이 로마를 방문했는데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알고 보니 로마사람들은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죄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이미 회개를 했으므로 더 이상 회개도 필요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어거스틴이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었는데 펠라기우스는 단정적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고 어거스틴에 대항하여 구원은 하나님이 내미시는 구원을 손길을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잡을 때 일어나며, 아무리 구원을 받았다 해도 방탕한 삶을 살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경고하여 훗날 ‘펠라기우스주의’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지적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들이며 회개하고 지금도 회개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방종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성령님은 중생하고 영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죄악된 삶을 살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며 한 번 받은 구원의 효력을 잃어버리도록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거듭난 자라 해도 육신의 연약함으로 여전히 죄를 짓고 잘못을 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같은 잘못을 짓지 않도록 도우시며 또 끝까지 천국에 입성토록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고 싶어도 성령님의 은혜로 인해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중죄를 짓고 방종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실제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펠라기우스주의의 후예들이 교회 안에 기생합니다. 소위 ‘유사칭의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화’의 삶으로 증거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받은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거듭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선언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처음 받은 칭의가 취소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런 주장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며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사람이 바꿀 수 없듯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선언을 인간이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것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이자 절대 법칙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연약하고 미숙하고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변화되고 성화되어 거룩한 성도가 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자랑스럽게, 자격을 갖추어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 전에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구원의 일에는 인간적인 결심이나 결정권이 개입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뿐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모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의 일환이자 요소들입니다. 마치 무지개의 색깔들처럼 구원의 여러 요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요소들을 어찌 가볍게 다룰 수 있습니까? 제아무리 현대인들이 값싼 구원을 말하고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하나님의 행사를 피조물인 인간이 가벼이 취급하거나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증거하였듯이 진정한 회개는 과거의 일들, 즉 죄 된 생각들, 행동들, 가치관과 세계관, 탐욕들, 그리고 거룩하지 못한 사소한 습관들까지도 단절하고 하나님에게로 완전히 돌아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이 가볍게 취급할 문제라고 보여집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이렇게 무심하고 무정하게 다루어도 된다고 보십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 이번 기회에 진짜 회개가 무엇인지 배우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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