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니콜라이 기도회 등 동·서독 민간교류, 독일 통일 밑바탕”

정치
북한·통일
노형구 기자
hgroh@cdaily.co.kr
오준근 경희대 교수, 7월 KPI Issue Brief에 게재
동독에서 탈출하려던 수백명에게 국경 경비대가 조준 사격을 가한 동서 베를린 장벽의 중간 지대인 소위 '죽음의 띠(death strip)' 자리. 다시 세워진 화해교회는 베를린 장벽의 소위 '죽음의 띠' 자리에 세워졌다. ©위키피디아

오준근 교수(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가 7월 한반도평화연구원(원장 조동준 박사, 이하 KPI) Issue Brief 제26호에서 ‘오랜 독일 통일 과정과 한국에의 시사점’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오준근 교수는 이 글에서 “‘대변인 말실수 한 번, 기자 오보 한 번으로 통일됐다’ 등 독일 통일이 손쉽게 이뤄진 것으로 취급하는 유튜브 (영상)이 넘쳐나고 있다”며 “그러나 독일 통일은 오랜 시간의 준비와 과정이 축적돼 나온 결과물”이라고 했다.

오 교수는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동·서독이 최종 통일된 일련의 과정을 직접 목도했다고 전했다.

그는 “1986년 Konrad-Adenauer 재단이 주최하는 베를린 세미나에 참가했는데, Berlin은 동독의 한 가운데 있었다”며 “서베를린에 체류하면서 체크 포인트 챨리에서 25마르크를 주고 당일 비자를 받아 동베를린에서 반나절을 머무르며 동독 사람들과 사회적 분위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서독 간 ▲자유 여행 ▲니콜라이 기도회 등 인적·물적 교류가 두텁게 축적돼온 결과 통일이 순적히 이뤄질 수 있었다고 했다.

오 교수는 “내가 진심으로 놀랐던 것은 '통일 전에 서독사람에게 동독은 비용만 지불하면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었다”며 “서독사람들이 동독에 있는 가족, 친척들에게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는 일상, 서독 교회가 동독의 자매 교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상, 이것이 서독과 동독의 통일 전 일상이었다”고 했다.

또 “동독 정부는 동독을 탈출하는 국민에게 총을 쏘았지만, 서독 정부는 동독과 교류하고자 하는 국민과 교회와 기업, 정당과 지방자치단체에게 별다른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여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가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막강한' 여권이라고 알려져 있다”며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 여행하기를 원해도 정부의 승인 없이는 갈 수 없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북한'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통일 전의 서독은 개인과 기업이, 정당과 지방자치단체가 동독을 방문하고,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 서독사람들의 자유로운 출입은 동독 사람들의 민간차원의 경계심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정부 차원으로는 교류·협력이 어려울 수 있지만, 민간차원의 교류·협력을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맡기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라고 했다.

오준근 교수는 동·서독 간 통일의 기폭제로 작용했던 민간교류 협력 중 하나로 동독에서 열린 성 니콜라이 교회 기도회를 제시했다. 이 기도회는 서독 개신교회를 중심으로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와 성도들이 1981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개최한 평화기도회에서 기원한다.

오 교수는 “1988년까지 동독은 현재 북한과 다를 것 없는 철저한 폐쇄 국가였으나, 1989년 3월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쵸프의 헝가리의 자유화 승인에 따라 동구권의 자유화 물결이 인 가운데, 동독 주민들도 여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며 “1989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앞에 독일 주민 300명이 ‘우리는 나가고 싶다(Wir wollen raus)’고 외치며 거리 행진을 벌였다. 동독 정부는 데모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고 다수를 체포했지만, 이 데모는 동독 주민들의 여행 자유화를 향한 전국적 데모 행진의 기폭제로 작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89년 9월 11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전면 개방하면서 이날 하루 동안 동독주민 3천명이 개방된 국경을 통과해 서독으로 향했다”며 “9월 한 달 간 서독으로 넘어온 동독 주민은 약 2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했다.

그는 “나는 당시 서독 정부의 침착한 대응을 잊을 수 없다”며 “서독 정부는 밀려 들어오는 동독 주민들을 그들의 희망에 따라 독일 연방의 각 주에 보냈다”며 “각 주 정부는 각 기초자치단체의 협조를 받아 동독 주민들이 자연스레 서독 사회로 편입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했다.

특히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3백명으로 시작된 동독 주민들의 데모 행렬은 동독 전역으로 확산됐고,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데모는 50만명을 추산될 정도였다”며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는 여행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했다.

오 교수는 이 과정에서 “보도자료에 날짜가 정확히 명기돼 있지 않아, 기자의 ‘언제부터?’라는 질의에 (동독 당국자가) ‘즉시”라고 발언한 것이 기폭제로 작용해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고, 이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며 “‘베를린 장벽’은 동독 주민들을 가두어 둔 것이었다. 장벽의 붕괴는 동독 주민의 여행의 자유를 회복시킨 사건이었다”고 했다.

오준근 교수는 당시 서독 교회가 동·서독의 자유로운 민간교류에 있어 최전선을 담당했는데, 여기엔 서독 정부의 행정적 지원이 밑거름이 됐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동독 지역에 파견된 서독 선교사인 카스너 목사의 눈물겨운 목회가 독일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키워냈다고도 덧붙였다.

오 교수는 “당시 현지에서 경험한 나의 생각은 '철저한 분권이 완전한 통일과 연결된다'는 역설이었다. 독일의 민주주의는 기초자치단체에서 시작된다. 시·군정부가 기본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완전한 국가 체제처럼 헌법과 법률을 갖춘 주정부가 형성된다”며 “독일연방공화국은 각 주정부의 연합체로, (당시) 서독의 시와 군들은 동독에 자매 시와 군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통일 전 동독과 서독의 교류를 담당했던 최전선엔 서독의 교회가 있었고, 교회는 동독의 자매 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했다”며 “이 가운데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간 독일을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의 아버지 카스너 목사도 있었다. 그는 서독 함부르크에서 동독에 파견된 선교사로, 동독의 철저한 탄압과 통제 속에서도 힘겨운 목회자의 생활을 하며 앙겔라 전 총리를 키워냈다”고 했다.

또 “동독에 민주화의 물결이 일었을 때 이를 격랑으로 만든 것은 동독의 지역 교회였고, 앙겔라와 같은 지방 정치인들이었다”며 “서독의 교회들과 서독의 지방정당들은 자신들이 자매결연을 맺은 지역에 인력을 파견했고, 파견된 인력들을 통해 재정을 지원했다. 이들은 동독 각 지역의 리더들을 발굴하고 철저하게 도움을 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는 북한선교를 실천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가 있다. 이들이 북한 각 지역과 교회를 도와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지지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아울러 “시장, 군수, 구청장에게 북한의 자매 시·군·구를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자유를 주고, 이들이 북한의 자매 시·군·구를 오가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꿈을 가득 심어주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동서독통일 #민간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