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작가들의 말말말>

도서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라는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물음이다. 아무 신문이나 들고 거기 나오는 부고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된다. 거기에는 죽음의 의미를 두고 그리스도교적 또는 비그리스도교적 고백과 철학적 또는 문학적 고백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물음은 모든 사회를 관통하는 물음이다. 인과응보 체계가 처음 보기에는 근사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가난과 질병과 위기, 모든 형태의 사회적 차별이 자신의 잘못과는 전혀 무관한 원인들에서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난이 자연재해에서 기인할 수도 있고, 아니면 훨씬 더 이전의 불의한 구조나 단순히 그 시대 권력자의 야만적인 폭력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신앙 안에서만 알 수 있고, 결국 신앙을 토대로 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점을 나는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둔다. 나는 자연 과학자나 종교학자, 또는 철학자로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로서, 달리 말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쓴다. 그러니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리는 오롯이 하느님을 통해, 그리고 듣는 신앙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를 ‘계시’라 일컫는다.

게르하르트 로핑크(저자), 김혁태(옮긴이) - 죽음 부활 영원한 생명 바로 알기

도서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필자가 정치와 관련하여 두 번째로 설교를 한 것은 2021년 1월 첫 주부터 약 10주간이었다. 이 두 번째 시기는 ‘코로나 발생 기간의 광화문 집회를 둘러싼 방역당국과 교계의 갈등’, ‘소상공인과 서민생활 지지를 위한 기본소득 논쟁’, ‘검찰 개혁 방법을 둘러싼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사이의 충돌’, ‘원전폐쇄를 둘러싼 감사원 감사로 인한 갈등’, ‘검찰총장의 사퇴’ 등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이 이미 진행되었거나 한참 진행 중인 상태였다. 각종 여론 조사의 결과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둘로 갈라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회 안에도 여론은 여전히 나뉘어 있었다. 두 번째 연속(시리즈) 설교는 이런 상황에서 역시 ‘감행’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첫 번째 시리즈 설교와 강조점이 약간 달랐다. 첫 번째는 우리 각자의 한계와 성경적 기준을 알게 함으로써 갈등이 임계점에 이르기 전에 누그러뜨리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두 번째는 이렇게 갈등하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런 갈등과 대치 중에도 우리는 이 사회를 더 바람직한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며, 우리의 논의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이런 갈등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바른 입장과 가치관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누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면 각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가 서 있는 현장과 상황에서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적어도 그 지점까지는 성도들을 이끌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고성제 –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도서 「요한복음,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가 거하는 집’이라는 표현은 성경 말씀에 한하여 옳습니다. 또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유입니다. 왜 지금 받아들여야 합니까?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죽은 자들”이기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린다면 그것은 오직 은총입니다. ‘들린다면, 이해된다면 지금 당장 받아들여라!’ 기독교의 신앙은 ‘지금’, ‘오늘’의 신앙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열정을 탓하지 않으셨지만, 겉으로 드러난 열정에 속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숨은 동기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에 민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더 자세히 얘기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거나 죄와 상관없는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죄’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정완 – 요한복음,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