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예루살렘이라 불린 평북 선천의 교회 역사와 교세

오피니언·칼럼
강석진 목사의 북한교회사 이야기(14)
강석진 목사

1907년 평양신학교를 최초로 졸업한 7인의 목사들은 자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운영하게 됨으로 조선 교회는 자립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는 길선주 목사가 담임하게 되었다. 이교회를 개척한 초대 목사는 사무엘 마펫이었고 2대 목사는 그레이엄 리 목사에 이어 세 번째로서 그 교회의 장로 출신이 담임 목사가 되었다. 이처럼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7명은 각자 사역지로 흩어져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당시 평양 다음으로 교세가 큰 지역이 평북도 선천이었다. 그 곳의 기독교인들의 비중은 50%정도로 평양보다 높았다. 인구 비율로 보면 가장 높았고 두 번째가 황해도 재령이었고, 세 번째가 평양이었으며 네 번째가 서울이었다. 그래서 그곳을 '한국의 예루살렘' 또는 '기독교왕국'이라고 불렸다. 선천은 처음에 읍단위의 작은 곳이었다. 후에 인구가 증가되어 선천군이 되었다.

이곳에 최초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1896년 평양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귀향한 노효준이었고 그 다음 해에 역시 평양에서 입교한 나병규가 돌아와 친구 조규환과 같이 전도에 나서면서 기독교인들이 형성되었으나 교회는 없었다. 이들은 남자들만 모여 이창석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여자들은 별도로 이두찬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다음해 1897년 성탄예배 때에 작정 헌금을 하여 600원을 모아 선천 석장동에 예배당을 마련함으로 선천 최초의 '선천북교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 선천북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할 때에 1천 5백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을 완공했고 그 때에 담임목사로 양전백이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자 바로 이 교회로 부임하였다. 양 목사는 총회장도 역임하였다. 선천에는 북교회와 함께 '선천남교회'도 대형교회로서 교인수가 1천 3백 여 명이었다. 선천에서는 장날이 주일과 겹치면 장이 서질 못했을 정도로 주일 성수를 전 교인이 철저히 준수하였다.

이곳에서 선교 사역을 한 대표적인 인물은 베어드, 휘트 모아가 1897년에 사역했고, 1901년에는 평양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지부가 설립되었으며, 샤록스 의사 부부, 죠지 렉 부부, 체이스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이 선천에서 1897년부터 1941년까지 44년 동안, 총 48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다양하게 하였다.

1941년의 교회 통계 자료를 보면 선천군에 교회가 81개가 있었고 목사가 27명, 장로가 153명, 교인 수가 약 2만 명이었다. 이처럼 교회 성장이 활발할 수 있었던 점은 선교사들의 공헌이 컸다. 선천 지역에는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 사역을 병행함으로 1906년에 신성학교와 1907년에 보성여학교와 1906년에는 미동병원이 세워짐으로 선교의 세 가지 조건인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워 복음화와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1907년 미국 북 장로교 연례보고회에 보고된 국내 6개 선교지부의 교세 현황을 보면 선천의 교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게 된다. 서울의 기독교 인수가 7,435명인 반면에 선천은 15,348 명이었고, 평양은 20,414명이었다. 이처럼 3개의 기독교인 수가 전체 인구 대비 가장 높았기에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과장이 아니었다.

선천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은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고 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예로서 1919년 3.1만세 운동 시에 선천에서는 남교회 목사 김석창과 신성중학교 교사인 양준명은 그날 정오를 기해 신성중학교의 종을 울릴 때에 전 직원과 전교생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또 보성여학교 학생 60명도 시위에 합류하였으며 시내 중심에 다 달았을 때에는 2천 여 명으로 늘어나 만세 운동에 일반인들도 참여하였으며 경찰에 6백 여 명이 검거되고 6명이 총에 희생되었다. 선천에서는 만세운동에 약 1만 여명이 참여하여 5월까지 이어질 정도로 민족의식이 매우 강한 곳 이었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선천은 성지로서 많은 애국지사와 학계와 정치계와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그 사례를 든다면 문교부 장관을 지내고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형룡 신학박사, 방지일 중국선교사, 서울대 장리욱 총장, 양전백 목사, 강신명 목사 등으로 선천의 교회는 그 시대의 복음화와 민족의 독립과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