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곡 넘어 아골 골짜기까지 찾아가 복음 전한 권서

오피니언·칼럼
강석진 목사의 북한교회사 이야기(11)
강석진 목사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서울과 평양처럼 큰 도시와 산간 마을과 낙도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성경을 전한 복음의 첨병들이 있었다. 그들이 권서였다. 이들은 성경 봇짐을 메고 팔도를 누비며 예수와 천국을 외치며 성경을 팔았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초창기에 선교사들에게는 복음의 길을 평탄케 하는 세례 요한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원래 이 권서 제도는 1804년 영국 성서공회가 설립된 후 성경을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권서 제도는 영국 성서공회와 스코틀렌드 성서공회와 미국 성서공회가 세계로 진출하면서 본격화 되었고 선교지 마다 제도화 되었다.

이들 각 공회는 현지인들인 권서를 채용하여 그곳에 자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전도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영국과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외국에 나간 선교사들 역시 현지의 권서들을 채용하여 이들이 전도를 하며 성경을 현지인들에게 유가로 판매하도록 하였다. 이 권서의 배후에는 선교사들이 있어 성경과 전도지를 제공하였고 이들을 유급제로 하였기에 권서 활동에 전념케 하였다. 이 권서들은 조선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여행의 자유를 제한 받는 시기에 이들은 봇짐에 성경과 전도지를 짊어지고 여러 험지와 오지를 다니며 전도를 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찍이 봇짐 장사꾼들을 통해 생활용품 등을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국내의 봇짐 장사꾼들과 국경을 넘어 중국을 드나들면서 홍삼과 한지 등을 팔며 다녔고 특히 평안도 의주 출신들이 이러한 국경 물자 교류하는 데에 많이 종사하였다. 이 권서들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주민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세요. 지금까지 제가 말한 복된 소식이 이 책안에 있습니다. 자 성경책을 한번 보세요."라고 하면, 그 주민은 돈이 없으니 딴데 가보슈"라고 응수하면, 권서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고 괜찮습니다. 보리쌀도 괜찮고 계란도, 짚신도 좋습니다." 라고 하면, 다시 응수하기를 "글쎄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니까요.", "아 그러면 제가 글을 가르쳐 드릴께요." 이처럼 이 권서들은 성경을 읽어주고 심지어는 가르쳐 주기도 하여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권서들은 성경 한 권을 팔아야 한다는 성취감 보다는 한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그에게 "제가 다음 장날 다시 올 터이니, 성경을 잘 읽어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세요." 라고 하였다.

이같이 성경을 권하며 전도하며 때로는 가르치는 역할을 한 최초의 조선인 권서들은 본래 만주를 다니며 홍삼이나 한지나 약초 등을 지고 다니다가 죤로스 선교사들 만나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 중에 서상륜은 의주 출신 봇짐 장사꾼들인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과 집안 출신인 김청송과 죤 로스 선교사와 함께 조선어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하여 출판하였다. 허지만 1880년대에는 쇄국 정책으로 외국에서 서양 종교 문물들이 반입할 수 없었다. 이에 죤 로스 선교사는 1882년 3월에 그의 제자이며 성경을 출판하는 데에 식자공으로 봉사한 김청송을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으로 보내어 성경을 보급하게 함으로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세례를 주러 죤 로스 선교사가 그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의주 출신 백홍준과 그의 친구들도 의주 지경에 무보수로 성경을 전달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는 그해 스코트랜드 성서공회의 권서가 되어서 한국 최초의 권서가 되었다. 스코트랜드 성서공회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랄 셔만호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갈 때에 그 성서 공회에서 파송된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1829~1890)으로부터 약 500여권의 한문 성경을 제공받고 그 경비를 지원받아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주민들에게 그 성경을 최초로 배포한 바가 있었다. 그후 다시 20여년 만에 죤 로스 선교사는 이제 조선인 권서인 백홍준을 택정하여 1883년에 조선어 쪽 복음서를 조선에 갖고 가게 하여 조선 땅에 조선어 성경이 최초로 배포되었다. 이는 언더우드(미북 장로교)와 아펜젤러 (미 감리교)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에 입경하기 2년 전에 백홍준은 권서의 자격으로 조선 땅에 최초로 성경을 배포하였다.

권서들의 사역에 대해 벙커(Bunker.D.A, 1853~1932)선교사는 이같이 증언하였다. "권서들은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이 가본 적이 없는 마을에 들어갔다. 그리고 길이든 여관이든 어디 가든지 성경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을 팔았다. 권서들의 활약으로 전도된 마을들은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마을에 한 번 들러 주세요. 우리 믿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들의 성경 보급은 교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교회는 마을의 신앙공동체가 되었다. 감리교에서는 이들 권서에 의해 1896년 이래 12년간 개척된 교회가 225개였다고 밝혔다. 이 권서들 중에는 선교사의 조사가 되기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1907년 이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권서들이 활동하였다. 이들이 1945년 해방과 공산화 될 때까지 활동한 권서들이 약 2천 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교회가 없고 목사가 없는 마을에 성경을 전하고 신앙인들을 세움으로 오지 마을에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하 귀한 사역자들이었고 복음의 풍매화였고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계속)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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