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신화의 오류(誤謬)

오피니언·칼럼
칼럼
이효상 원장

최근 미국 투자전문가이자 경제학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쓴『행운에 속지 마라(Fooled by Randomness,중앙북스)』를 읽으며 많은 부분을 공감하였다. 책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상당한 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며, 그것을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하고 자만할 경우 끝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자기 계발서에서도 주장하듯이 성공하지 못하고 사회적 부를 이루지 못하면 자신이 능력이 없고 게으르고 나태해서라고 다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성공에도 운이 따라 주어야 하며 성공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보통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사회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발상 자체도 틀렸다. 좁은 도랑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는 것 자체나 용이 되지 못했다고 자신을 탓하기엔 세상이 그리 ‘공정’하지 않다. 비단 젊은이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갈수록 커지는 소득 불평등과 줄어드는 일자리는 탈출구가 없다. 용은 넓고 넓은 바다에서 나온다. 용이 승천하려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야 한다. 쨍쨍한 날씨에 용이 되어 승천한 예가 없다. 역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별 수 없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 유능한 조력자, 절호의 기회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그나마 연못에 갇힌 용이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정말 우리의 미래는 암울한 것인가. 서울의 경우 열 집 중 세 집이 ‘1인가구’로 위기대처의 어려움과 외로움, 경제적 불안감을 안고 산다. 이런 사회를 보며 어떤 지도자도 ‘미래’를 이야기하는 지도자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코로나는 모두에게 큰 ‘위기’이다. 물론 ‘기회’라고 읽는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특히 최근 신축 300석 이상의 대형교회가 부동산 매물로 300여 건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그 중에 여러 건이 경매에 나오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소위 ‘잘나가던’ 목사님이 무너졌다. 모(某) 목사님은 교회를 그만 뒀다. 교회가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악조건들이 결국 그를 물러나게 하였다. 개척해서 교인들이 몰려오고, 그래서 건축만 하면 더 잘 되리라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 빚으로 어렵게 천 석에 가까운 성전을 건축하고 교인들만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코로나로 건축한 교회에 성도들이 나오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헌금까지 줄어든 것이다. 크게 지어놓은 성전이 무용지물이었다. 매달 건축비의 이자가 수천만 원씩 나가자 견디지 못하고 은퇴하겠다고 했으나 그 교회를 인수하거나 감당할 교회가 없었다. 이런 문제로 그분은 교회 앞에 은퇴 퇴직금을 요구했으나 그마저도 감당이 안 되었다. 결국 교회는 경매에 넘어가고 목사님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다. 정권이 정치를 잘못해서만도 아니다. 이런 일들에 대해 근본적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예전엔 그렇게 해도 너무 잘 되는 바람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게 복(福)이 아니라 화(禍)였던 것은 아닐까. 브레이크(brake) 없는 질주를 계속해도 당연히 잘 된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신중하게 좌고우면해야 할 상황에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하면 된다’는 성공신화나 신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스타트업(Start-ups) 업계에서는 실패를 ‘명예의 훈장’ 또는 ‘수업료’로, 기업가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얘기하기 일쑤다. 그러나 실패한 창업자들을 만나보면 분노, 죄책감, 슬픔 등 날 것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실패는 인간관계도 망가뜨리고 경제와 사회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렇듯 사람들은 일의 성취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한다. 어찌보면 우리의 크거나 작은 성취는 수없이 많은 변수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합종연횡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꼭 교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업이나 일터의 세상만사가 그렇다. 관계된 조건들이 제대로 들어맞을 때 일정한 성취가 일어난다. 한 가지 요인만으로 단정하고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세상 만사가 그렇다.

필자의 칼럼을 즐겨 읽는 독자 분이 “모처럼 야외로 나가 매운탕이나 한 그릇 하시죠” 해서 나갔는데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그렇게 해서 정작 갔는데 매운탕 가게가 폐업을 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뤄내는 크고 작은 일에는 언제나 이런 다양한 변수의 영역이 존재한다.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사람은 오만해지고 긴장하지 않게 된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의 무용담이나, 사업에 성공했다는 이의 휘황찬란한 신화만 거론될 뿐 전사자나 사업 실패자의 뼈저린 체험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은 생존자 편향의 오류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일 수 있다.

열무국수를 잘하는 가게가 있다. 가끔 열무국수의 시원한 맛을 보려고 종종 갔다. 사람 좋은 주인장이 어느 날부턴가 손님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엔 손님들이 몰려와 줄 설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하긴 예전엔 그런 맛이었다. 그런데 주방장이 바뀌어서 그런지 요즘은 면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덜 익은 밀가루 맛에, 깔끔하게 씻지 않은 밀가루의 뻑뻑함 뿐이다. 주방장이 인심이 좋아 그런지 기분에 따라 면을 정량보다 두 배로 준다. 잘 드실 것 같고, 아시는 분이라서 더 드린다는데, 정량개념은 이미 없다. 1인분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 2인분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는 건 고역이다. 열무국수의 약간 얼은 시원한 아이스 육수도 사라졌다. 미지근한 맛이다. 그나마 국수를 간신히 먹고 있으면 서비스라고 만두를 한 두개 또 준다. 매주 가고 싶어도 먹고 나면 다음에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은 자연히 사라진다.

과하거나 부족하면 제 맛을 못내는 음식처럼 모든 문제의 핵심이 ‘균형’과 ‘절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놓친다. 술에 취해서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문제는 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절제 없음’이다. 술에 취하면 자제력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자제력이 없어서 술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자제하지 않으려고, 자제하지 못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술이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 위해 핑계거리로 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술만이 아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양보다 많이 먹으면 그것이 탁한 피와 살이 되어 결국에는 병에 걸린다.

균형과 절제는 인내를 필요로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지만 건강이 나빠질 수 있으니 참는 것,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먹지 않는 것, 익히 잘 알고 있는 건강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들을 먹지 않는 것, 무례한 상대에게 욕하고 싶지만 참는 것, 화가 나지만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것, 본분을 잃지 않는 것, 즐거움을 찾아가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 등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모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의 절제나 인내도, 의지도 한계가 있고 고갈될 수 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참는 기분이 아니라 당연한 습관으로 시스템화하거나 환경이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남에게 절제를 강요하진 말자. 그의 입장이 되어 보자. 그 입장에서 이해하고 강요하고 싶지만 기다리는 것, 참는 것도 ‘절제’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생긴다. 신앙심이 깊다고 결코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련이 꼭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과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의 신앙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리고 때로는 질문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의 땀과 눈물과 노력이 헛된 것입니까?” 하고 묻게 된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진지한 대화, 진국의 대화가 오고간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점차 진국이 되어 간다.

정치권력은 술과 같다. 크든 작든,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 가지면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든다.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무절제의 문제다. 민주주의 정치에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독재, 독주, 독선, 독단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쥔 권력은 주변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작은 권력은 적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만, 큰 권력은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술을 마셔서 절제력이 없어진 사람보다 절제하지 않으려고 술을 마신 사람이 더 위험한 것처럼, 권력을 가져서 자기도 모르게 절제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절제하지 않을 조건으로 충분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위험하다.

이런 성공이나 권력은 아주 많은 변수들의 합산이다. 눈에 띄지 않는 요인들의 합종연횡의 결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항상 상대적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저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인 양 우쭐대다 결국 교만하여 넘어진다. 이런 사람이 맞게 될 파국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파국을 맞기 전이나 파국을 맞으면, 주변 여러 사람들이 불안하게 되고 불행케 한다. 사람이 가진 권력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경험하게 될 불안과 불행도 커지게 된다. 그래서 시련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든다. 절제하게 만든다. 시련 속에서 진지하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시련을 통해 우리를 빚어 가시는 그 손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천하의 주객 이태백은 물 위에 뜬 달을 잡으려고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었다는데,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태백이 그렇게 어리석었던 건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술이 웬수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오만, 짧은 순간에 맛보는 그 권력의 황홀함. 그리고 죽음이란 대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게 하는 그 미지의 유혹(템프테이션: temptation)을 이기는 힘이 ‘균형’과 ‘절제'가 아닐까.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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