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parable)를 통한 하나님 나라 가르침(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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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2) 선한 목자 비유(요 10:1-15)

(1)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

김영한 박사

예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로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18).

선한 목자(the Good Sheperd) 비유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비유로서 예수가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명료히 드러내시는 설교다. 참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나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이리가 오면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달아나 양들이 희생을 당한다. 삯꾼이나 절도나 강도는 거짓 선지자나 정치 지도자나 양들을 수탈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선한 목자다.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양들을 구원하는 선한 목자다.

(2) 예수는 양의 문

예수는 그를 통하여 양들이 우리(sheep pen)를 들어 오고 나가는 통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요 10:2)다.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문을 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들은 따라간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 10:3-4). 팔레스타인에서 밤이면 울타리나 담으로 에워싼 구역 안으로 양떼를 몰아 넣었으며, 문지기가 그리로 들어가는 문을 지켰다. 이른 아침에 목자들은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양떼를 끌고 나와 목초지로 인도했다. 양들은 양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고 나가면서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손실 없이 사육되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인도함을 따른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예수가 문이라는 사실은 그의 양들인 신자들에게도 해당한다(요 10:9). 오직 예수 안에서만 생명으로 가는 문이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3) 문을 통하지 않는 자들은 절도, 강도, 삯꾼

예수는 양의 문(gate)을 통해서 들어 오신다. 그래서 그는 적법한 목자임을 입증하신다. 더 나아가서 그 자신이 유일하게 적법한 출입문이다(요 10:7). 그를 제외하고 혹은 그를 스쳐 지나서 양떼에 손을 데려고 하는 자들은 절도요 강도이다. 절도나 강도는 목자가 아침에 나타나기 전에 밤중에 온다. 양의 목자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나, 절도나 강도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요 10:1)다. 절도나 강도나 삯꾼들은 예수보다 먼저 온 자들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요 10:13). 양들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한다(요 10:5). 예수는 이 비유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을 절도요 삯꾼으로 암시하신다. 그 이유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예수의 증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6). 그리고 절도요 강도는 그외에도 정치 지도자나 거짓 예언자들나 거짓 메시아 등을 의미할 수 있다.

(4) 예수 외 다른 구원자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 내지 종교혼합주의 거부

선한 목자 비유는 양의 문인 예수 외에 다른 문으로 양을 인도하는 자를 절도, 강도, 삯꾼으로 비유하면서 예수 자신만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살린 선한 목자인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 비유는 오늘날 WCC가 1970년대부터 인도 신학자 사마르타 등을 종교대화 프로그램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종교대화를 시작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을 명백히 거부하는 것이다. 사마르타, 니터, 토마스 등 인도신학자들은 성경을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취급하고,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타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다.(김영한, “WCC 핵심 사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 2013년 한국복음주의 조직신학회 가을학회 논문발표, 나사렛 대학교. 조직신학 연구,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2014 봄 여름, 제20호, 15-17.) 이 종교대화 프로그램은 이미 1968년 스위덴 웁살라 총회에서 결의되었다. 1989년 산 안토니오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WME)는 “타종교 안에서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비기독교 종교들 사이에서 사역하시고, 하나님의 구원능력에는 한계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고 있는 하나님은 타종교인들의 삶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990년 정초에 스위스 바아르(Baar)에서 WCC, 정교회, 가톨릭교회가 함께 논의하고 이끌어 낸 바아르-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주의를 천명한다: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하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http://www.cyworld.com/dudrka8888/4734415) 이 선언문은 창조주 하나님 내지 성령이 타종교인들 즉, “산 신앙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과, 타종교들 속에서 구원의 신비를 인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대화에서 그들에게 접근하는 자세라고 주장한다. 2000년 WCC 산하 CWME는 다음같이 ‘그리스도 바깥 구원 가능성’을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외에 다른 구원을 이야기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떤 제한을 둘 수 없다. 이상의 두 문장 사이에는 긴장이 있으나, 이 긴장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2005년도 선교와 전도문서: “교회의 치유선교” 선언문 73항에서 77항까지에서 CWME는 “다른 종교에서 유래된 치유요법, 즉 다양한 전통종교의 처방, 요가, 영기(靈氣)요법, 수기요법, 선(禪) 명상 등에 대한 개방성과 의존성은 교회와 기독교 관련의료기관에서 많이 토의되는 주제이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의 치유의 영성과 호환을 희망하며 “모든 치료수단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그리스도인은...기독교가 아닌 특정 종교의 세계관과 연관된 위험스러운 치료관습에 정성을 들인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겉보기에는 유익하게 보이는 치유 요법 뒤에 숨어 있는 악령의 힘이 자신의 파괴적인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잘 깨닫지 못한다”고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WCC는 “다른 종교에 뿌리를 둔 치료 요법과 기(氣)치료 등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치료방법과 고대로부터 내려온 영적 전승을 교회 자체 안에서 재해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중립적으로 주장한다. WCC는 치유에 있어서도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 영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WCC는 전통종교 유산으로 말미암는 치유를 기독교에 혼합주의적으로 수용하면서 창조자의 영과 창조신앙이 없는 범신론자들이나 다신론자들의 “능력”에 대해서 영분별의 필요성을 명료하게 주제화하지 않는다.

(5) 예수는 선한 목자: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목자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리고 예수는 양들이 생명을 얻되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희생을 하신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삯꾼이나 품꾼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획득이 주 관심사이며 양들과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다. 그러나 예수는 양들을 잘 알고 이들과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예수는 자기의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이 영생은 예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예수와 양들 사이의 관계는 그 깊이에 있어서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내적 관계에 정확히 상응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이 구절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심을 통한 예수의 대속 사건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영원한 구속의 섭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백성 무리에 들어 올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우리에 들지 않는 양들”이란 부활절 이후에 이방민족 선교에 의하여 복음을 믿게 될 비유대인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시사해주고 있다.

(6) “나는... 이다”(ego...eimi, I am...) 어법: 메시아적 자아의식 표현

예수는 “나는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이다“ 라고 “나는.. 이다” 어법을 사용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a),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b),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1). ”나는... 이다“의 어법은 이미 구약에서 절대적인 어법으로 나타난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사 41:4b),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 48:12b). 구약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어법은 하나님이 이방에 포로되어 간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 세상의 유일한 주관자요 주관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이다“ 어법은 예수 자신이 일반 사람이나 사물과 일치되는 내용을 넘어서는 계시적 절대적 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έγὼ καί πατήρ έν ἐσμεν, The Father and I are one, 요 10:30). 이 문장은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절대적 어법이다. 이러한 어법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그의 신성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는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자기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8-11). 예수는 이 문장에서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격됨을 천명하신다. 우리는 그의 어법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한 것처럼 나사렛 예수가 자기의 메시아됨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성령으로 내면적으로 충만한 메시아적 자아의식 속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7)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권세를 지닌 메시아인 예수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예수는 자신의 권능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씀하신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 17). 예수는 자신이 가진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여기서 나사렛 예수가 하신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씀을 수록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씀은 역사적 예수의 원천을 드러내는, 삼위일체의 핵심을 드러내는 계시적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한다. 안식일에 베데스타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도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여 대답한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러한 예수의 대답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없애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요 10:33b)이라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는 그 증거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음과 자신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메시아적 권능 사역과 자신 안에 아버지의 내주(內住)를 증언하신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이 모든 예수의 말씀과 치유에서 나타난 권능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료히 드러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화된 것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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