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2. 죄책감

오피니언·칼럼
기고
류현모 교수

기독교 심리학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선택한 인간의 마음에 실존하는 객관적인 죄를 인정한다. 또한 그로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뒤틀리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내부정보를 통해 하나님과 그분이 정한 도덕률에 반발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폴 비츠는 원죄 교리와 인간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죄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우리의 상태에 의미를 부여하고, 변화의 방향성에 대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도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세속적 심리학은 세속적 신학, 철학, 과학의 가설들에 영향을 받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초자연을 부인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에 대해서도 물질적인 방법으로 밖에 연구할 수 없다는 심신일원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런 무신론적 심신일원론에 가장 합당한 심리학의 분파는 행동주의이다. 이것은 눈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만으로 심리를 연구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무신론자들은 논리적으로 행동주의 심리학을 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로 무신론자들 중에 행동주의를 취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단순한 기계로 취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신론 심리학자들은 제3세력 심리학에 속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제2세력), 사회와의 관계는 도외시하고 개인의 내면에만 집중하는 프로이트의 임상심리학(제1세력)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인본주의 심리학은 원죄를 부정하고, 하나님이 제시한 지키기 힘든 도덕률에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심리적 죄책감’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원래 인간은 죄 없이 태어나지만 가정, 교회, 국가와 같은 잘못된 사회기관의 악한 문화로 인해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죄에 대하여 ‘심리적 죄책감’만 느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본주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개인의 악한 행동의 근원이 문화의 영향이라는 주장은 문화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문화를 형성하는가?”라고 하며 그 주장에 반대한다. 우리 개개인의 안에 악으로 향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문화나 사회가 악해질 수 있겠는가?

개인이 가진 죄와 그에 대한 죄책감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심한 경우에는 병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각 심리학의 분파들은 인간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무신론적 인본주의에서는 인간 내면의 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방법으로 제시한다. 인간은 선하여 완전을 이룰 수 있는데, 사회제도의 문제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죄책감으로부터의 회복은 인간 내면의 선한 자아와 접촉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인간에게 내재한 선한 자아라는 개념은 성경이 의미하는 절대적인 선이 아닌 상대적인 선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앞서 제기한 롤로 메이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 조이스 밀튼은 “정신이상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에서 세속적 인본주의 심리학의 선구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제시한 학문적 주장과 그들의 삶을 비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현실 적용에 실패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의 티모시 리어리라는 정신과 의사는 환자들과 성관계를 가지고, 환각제를 복용하고, 학생들에게 마약을 권장하는 등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인본주의 심리학은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심지어 없던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의 치료가 바로 질병이라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뉴에이지의 경우 소위 브라만(신, 큰 나, 고등한 의식)과 아트만(작은 나)이 하나가 될 때 모든 것을 지적으로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큰 깨달음 혹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힘들뿐 아니라, 그들이 해결책으로 제시한 방법이, 명상, 요가, 참선, 최면, 불속을 걷기, 영혼과의 교류, 심지어 마약을 사용하는 것에 이를 때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모던의 경우 개인의 자유가 최고의 미덕이기 때문에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또한 이들은 ‘지킬과 하이드’처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나타내는 다중인격적 인간을 허용한다.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후에 “그건 나의 다른 자아였어. 지금의 내가 아니야.”라고 책임회피를 할 수 있게 만드는 파괴적인 심리학이다.

우리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에는 세속심리학자들의 달콤한 설명에 넘어가 자신의 죄를 눈 감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참 빛이 나에게 비춰올 때 그 빛 가운데 나의 모든 죄가 드러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말로 우리를 위로하더라도 그 죄의 존재와 그로 인한 죄책감을 부인할 수 없다. C.S. 루이스는 내 죄가 밝은 그 빛 속에서 드러나 버린 낭패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나에게 복음으로 다가온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심리학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은 각 개인에게 실존하는 원죄와 죄로 향하는 속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로 인해 발생한 죄책감과 고통과 질병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나와 하나님, 이웃, 자연환경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회복된 개인에게 부여된 도덕적 책임감을 통해 개인과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

묵상: 지금 나를 괴롭히는 죄책감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류현모(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분자유전학-약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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