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3)

오피니언·칼럼
기고

5. 정통 개혁신학적 성경관

김영한 박사

고봉은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주장하면서 고평비평을 비판했던 구(舊) 프린스턴학파의 헨리 그린(Henry Green) 교수와 그의 제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오스월드 앨리스(Oswald Allis) 박사의 논거에 근거하여 모세오경에 대한 자유주의의 문서설을 비판하면서 모세 저작권 논제를 구성하고 있다.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주장을 성경의 내적 증거와 비평학자들의 주장들의 문제점들을 통하여 해명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 신화와 비교한 창세기 내용들의 독특성, 그리고 당시 진행되고 있던 고고학적 발굴의 객관적인 자료들을 활용하여 구 프린스턴 학파의 성경 영감설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고 있다.(김치선 저,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모세와 오경』, 선교 횃불, 2015.)

고봉은 신학박사 학위논문 서문에서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일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사회복음”(Social Gospel) 선포하고 “보혈 속죄”(Blood Atonement)를 거부하고 있다. “비평가들이 오경의 모세 저작설과 이른 시기의 저작이라는 면에서 성경을 비평하고 공격하므로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내적인 증거와 외적인 증거를 통해 비평가들의 잘못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논문이 쓰여졌다.” 그는 문서 비평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고대 근동의 창조론과 신화론의 서사시를 심도 있게 연구했다. 언어학적으로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를 직접 읽고 분석하고 있다. 고봉은 역사비평학의 모세5경의 영감성 및 모세 저작설 부인에 대하여 다음 4가지 점에서 반박하고 있다.

1장, 성경 자체가 모세가 오경의 저자라는 것을 입증한다.

2장, 파괴적인 비평가들의 주장을 설명한 후에 핵심적 내용: 모세 오경의 시대착오, 불일치, 비일관성 비판을 반박하고 모세가 오경의 저작임을 입증한다. 이 장에서 저자는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쿠에넨(A Kuenen),그리고 드라이버(S. R Driver), 스미드(R W. Smith)를 비롯한 문서설을 주장한 성서학자들의 주장을 성경과 당시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자료들을 이용하여 비판하며 오경의 모세 저작설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독일의 보수주의 구약학자 카일(Carl. F. Keil, 1807-1888)과 델리치(Franz Delitsch, 1813-1890)의 『모세 오경 주석』(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1866), 구프린스턴의 그린(Henry Green)의 『오경에 대한 고등비평』, 그리고 화이트로(Thomas Whitelaw)의 『창세기,출애굽기,민수기 강단주석』(The Pulpit Commentary of Genesis, Exodus, Numbers), 알리스(Oswald Allis)의 주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모세 시기에 십계명의 입법 가능성을 주장한 로버슨(Robertson, Early Religion of Israel)과 오르(James Orr, The Problem of the Old Testament)의 견해를 인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3장, 바벨론 신화와 비교하면서 오경의 모세 저작 사실을 입증한다.

4장, 모세와 아브라함의 실존 가능성을 고고학적 증거를 통하여 설명하면서 모세의 오경 저작임을 입증한다.

결론에서 연구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고봉은 그의 논문에서 19세기 후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서 성경의 영감설을 주장하면서 문서설을 강력하게 비판한 그린(William Henry Green, 1825-1900)의 저작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린은 구약신학을 가르치면서 당시 성경에 대한 문서설의 고등비평이 물결이 강력하게 밀려오던 시대에 필생의 저작으로 오경의 모세저작을 입증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의 글들은 그의 사후에 모세오경에 대한 고등비편이라는 저서로 출판되었다.

고봉은 19세기 독일 루터교 전통의 정통구약학자들의 견해도 많아 참고했는데 카일은 헹스턴베르그의 신학을 이어받으면서 독일 자유주의신학의 문서설을 무시하고 구약을 하나의 영감된 계시의 책으로 본 정통보수적인 구약주석학자였고, 델리치도 엘랑엔 교수로서 구약의 영감설에 근거한 견해를 피력한 보수적인 학자들이었다. 두 학자는 공동으로 구약의 주석을 펴냈고 이 주석은 오늘날까지 보수신학의 목회자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알리스(Oswald T. Allis. 1880-1973)은 독일 베를린대에서 1913년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린스턴신대에서 1910-1929년 전임강사와 조교수로 가르치다가 좌경화에 반대하여 메이천을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수(1929-1936)로 봉직한 복음주의 학자이다. 그는 모세가 모세오경을 저술했다는 『모세오경』을 출판하였다. 그의 저서가 많이 인용되었다. 스코트랜드 출신의 제임스 오르(James Orr)의 1906년 문서설 비판 저서 Problems of the Odd Testament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Recent Criticism)도 인용되었다.

고봉은 그의 박사 논문에서 창세기 36장 31절에서 스코필드의 성경(p. 35)를 인용하는 것 외에는 달라스신학교 교수들의 저서를 인용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는 고봉의 박사 논문에 달라스의 세대주의적 영향을 나타나지 않고 그린과 엘리스를 중심으로 한 구프린스턴학파와 웨스트민스터학파의 개혁신학적 입장이 주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루터교 전통의 카일 및 델리치의 견해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당시의 성서 및 근동아시아 고고학자 올브라이트(W. F. Albright, 1891-1971)의 저서 『팔레스틴의 고고학과 성경』(The Archeology of the Palestine and the Bible, New York: F1eming H Ravell,1932), 영국 복음주의적 고고학자 마스톤(Charls Marston)의 『1925-1933년으로부터 새 성경 증거』(New Bible Evidence from the 1925-1933 Excavations, New York: F1eming H. Revell Company, 1934), 미국 고고학자 고고학자인 울리(C. L. Wooley)의 아브라함 시대의 우르지역의 환경과 발굴 결과에 관한 연구결과를 빌표한 논문들(Antiquaries' Journal Vol. V, No.4 와 Vol. VI, No.4에 기고) 등으로 보아 고봉의 논문은 구약신학적으로도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것을 평가된다.

6. 하나 되게하는 성령론 및 은사 지속론 입장

1) 성령의 역사를 하나됨과 관련시킴

고봉은 일본 동경에서 대형 한인교회인 동경 신주쿠중앙교회(東京新淑中央敎會)를 목회하면서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리면서 영감으로 준비된 설교로 성경적 진리를 선포하면서 동경 안에서 조선인으로서는 큰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다. 성령의 살아있는 생동적인 사역에 대한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한 부흥, 성령의 비상한 역사를 통한 교회의 회개와 갱신, 성도의 삶의 변화를 강조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봉에게 있어서 성령 은사는 눈물 목회로 나타났다. 1944년부터 시작된 고봉의 눈물 목회는 새벽기도회를 통해서 민족의 해방을 준비했고,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의 정치적 혼란기에 월남 피난민들과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비애를 달래주었다. 3백만 구령운동의 중심은 남대문 교회였고, 중심 인물들은 남대문교회의 신자들이거나 남대문 교회 내의 대한신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70명의 전도 목사들과 함께 전국적으로 복음 전도 집회를 하였다. 이 때 월드비전(World Vision, 선명회) 창설자요 세계적인 부흥 강사였던 밥 피얼스(Bob Pierce), 국내 부흥사 이성봉, 김인서, 박재봉, 손양원 목사 등이 설교하였다.

고봉은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또는 설교 중이나 강의할 때, 심지어는 상담할 때에도 자주 논물을 흘렸다. 그 논물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흘린 눈물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흘린 높은 차원의 논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의 예레미아“ 혹은 ”눈물의 선지자“로 추앙받았다.” 고봉은 대한신학교 강의 시간에도 자주 눈물로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고봉은 교회의 부흥을 강조하였다. 부흥을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개혁신학의 전통이 가르치는 바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였다. 고봉은 성령의 역사를 하나되게 하는 것, 평화로 보았다. 그는 “성령의 역사”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디서 실현되고 있습니까.. 화평으로 연합한 중에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맺어지며 평화의 관계가 성립됩니다”고 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언제나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이것이 성령의 역사로부터 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읍니다.” “하나되게 하는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영적 일치의 이룸입니다.” 고봉은 성령 받음을 강조한다: “오늘도 우리의 급선무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 우리 성도들이여, 한 마음으로 힘써 항상 기도하되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함없이 성령이 오시지 않고 또한 역사는 중지되는 것이니, 우리는 쉬지 말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고봉은 성령의 역사는 화평으로 연합하는 중에서 되는 것이라고 외쳤다. 고봉은 박형룡이나 박윤선처럼 성령론을 학문적으로 가르쳤으나,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민족 복음화운동을 전개하는 등 성령 사역을 위하여 실천적으로 활동하였다.

2) 은사 지속론

고봉은 자신이 치유 은사를 직접 사용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흥전도자로서 조나단 웨드워즈가 일으킨 대각성운동처럼 성령의 사역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은사 지속론의 입장에 선다. 그가 매일 새벽에 기도하면서 일제하에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과 이념적 분쟁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것은 그가 받은 성령의 은사라고 보아진다

고봉이 남대문교회를 사임하고 창동교회를 개척했을 때 많은 남대문교회 성도들이 이전해왔는데 그중에는 훗날 전도관을 창설하여 이단 교주가 되어 교계에 물의를 일으킨 박태선 집사가 있었다. 박태선은 초창기에는 흠잡을 때 없는 훌륭한 교인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겸손했으며,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교회에 나오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열렬하게 찬양을 했고 교회 일이라면 자기 사업을 제쳐두고 봉사했다. 특히 목사 대접하기를 그야 말로 하나님 대접하듯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김치선 목사에게 뿐만 아니라 전교인에게 신망과 사랑을 받았다. 김치선 목사는 창동교회에서 많은 교인들에 의하여 장로로 피택되어 장로 안수를 받게된 박태선에게 담임목사로서 ‘언제나 많은 은혜를 받다보면 교만해져서 탈선할 수 있으니 대한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는 바쁜 생활로 늘 미루어 오다가 결국 신학을 하지 못하게 됐고 탈선하게 된 것이다. 박태선은 은혜를 받는 일에 열심을 내어 변계단 권사, 이성봉 목사 등 유명한 부흥사들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여 자기도 안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안수를 받고 실제로 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았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봉이 허락해주었으니 고봉은 성령 은사 지속론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태선이 악령에 사로 잡혀서 돌변하게 된 것은 바로 1955년 3월 28일부터 남산공원(한국 신궁터 광장)에서 열린 부흥집회 때부터였다. 환자들이 일어났고, 몸이 떨리면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으며, 어떤 이들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서 그 바람에 실려 온 신비로운 향기였다. “난데없이 썩은 뼈 타는 냄새가 나더니, 그 악취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백합화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이슬이 내리고" 기이한 광채가 그 분위기 속에 자욱했다. 이처럼 놀라운 기적(?)으로 박태선은 전국을 돌며 집회를 했고 많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태도는 완전히 돌변하여 자신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권세··· 주님 보좌에 같이 앉을 권세, 만왕의 왕의 이름을 받을 권세"를 힘입어 속량(贖良)의 대업을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주의 보혈을 받았고, 자기 몸에서 이루어졌고, 남에게 분배해 준다"고 하는 “피가름"의 실행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 후 고봉은 그를 교회에서 제명처분하고 장로직을 면직 시켰으며, 관계를 단절하였다. 고봉이 남대문교회 시절에 박태선에게 장로 안수를 주고 그의 집회를 도왔다는 것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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