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적인 측면에서 본 6·25 전쟁과 한국사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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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는 올해 6·25 7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신학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박명수 교수(한국교회사)의 논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본 6·25 전쟁과 한국사회’를 연재합니다.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머리말: 6·25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우리가 6·25 전쟁을 언급할 때 항상 덧붙여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표현이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아야 할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이 6·25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80년대 KBS를 통하여 전개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6·25가 남긴 비극이 얼마나 큰가를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도 6·25는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점에서 한 민족의 역사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 질렀다.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 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한반도에는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도 6·25는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6·25 전쟁 동안에 한국 기독교는 막대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북한 기독교인들의 월남은 6·25를 통하여 절정을 이루었고, 한국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북한 땅은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는 지역이 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했던 북한은 강력한 반미국가가 되었고, 이것은 반기독교운동으로 이어졌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지역이 북한이다.

필자는 이상의 6·25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최근 필자는 6·25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좀 더 포괄적으로 6·25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분명 6·25는 한국민족의 가장 큰 아픔이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6·25를 딛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필자는 6·25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38선이 휴전선이 되어 한반도를 완전히 둘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의 38선도 한반도를 둘로 나누는 분단선이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곧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을 통해서 38선은 휴전선으로 변했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의 군사전문가들이 작전을 위해서 지도상에 그어 놓은 것이지만 휴전선은 공산군과 연합군, 북한과 남한이 서로 싸워 전쟁 가운데 만들어진 국경선이다. 이 휴전선은 미·소 양 진영이 서로 싸우고, 여기에 우리 민족이 참여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며, 전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인 동시에 앞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휴전선은 이전의 38선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된 것이다. 이제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져 있고, 북한은 북방공산주의라는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남한은 남방 자유민주세계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본 글은 우선 6·25 전쟁으로 인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말하려고 한다. 사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6·25 전쟁은 미소 양 진영을 중심으로 냉전체재가 확립된 것이다. 이제 세계는 공산권과 서방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국제적인 변화는 한반도에 심각한 변화를 가져 다 주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네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6·25 이후 한국 사회는 분명하게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었고, 둘째, 한국정치의 측면에서 남한 사람들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셋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세계적인 시장경제 체재에 편입하게 되었고, 넷째, 한국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새로 들어온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동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이 네 측면을 설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6·25 전쟁은 한국민들에게 심각한 과제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어떻게 분단된 한반도를 다시금 하나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6·25 전쟁이 한반도의 통일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필자는 결론적으로 오늘의 우리는 6·25 전쟁이 남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6·25 전쟁은 양측이 다같이 자신들의 채제가 보다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전개된 전쟁이다. 북한은 인민해방을 외쳤고, 남한은 자유통일을 주장했다. 우리는 6·25 전쟁이 끝난 70주년을 맞이하여 누구의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6·25 전쟁이 남긴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본다.

I. 6·25 전쟁이 만들어 놓은 국제질서의 변화

6·25 전쟁은 본질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소련과 이것을 막으려는 미국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이다. 원래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을 비롯한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국과 소련은 각각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냉전사학자 개디스의 말처럼, “전쟁은 끝났지만 축제는 없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양 진영이 한판 벌인 것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미국은 소련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소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자본주의 패권과 언젠가는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전선에서 승리로 끝나자 소련은 자신과 인접한 국가에서 이것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들이 공산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과 협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미국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소련에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소련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미국과 소련의 협력관계는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한반도의 분단이다. 1948년 소련은 북한을 인민공화국으로 만들고, 미국은 남한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소련은 한반도에 공산기지를 구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장개석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아세아에서 공산주의는 승기를 잡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공산당에게 넘겨주었지만 중국을 소련에서 분리하여 유고와 같은 독립적인 공산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미국은 1950년 1월 중국 공산당에게 대만과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소위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중국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냈다. 이런 미국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소련은 미국의 한국전 개입 반대로 이해했고, 여기에 자신감을 얻는 소련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소련의 한국전쟁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다. 첫째로 소련은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했던 말이다. 둘째로 소련은 만일에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공산주의의 입지를 강화해 줄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두 번째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소련은 두 가지 위협 속에 있었다. 하나는 유럽전선에서 공산국가들의 어려움이다.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서방세력에게 밀리고 있었고, 여기에 쏟는 미국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신생 중공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련은 만일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중공군이 참여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것은 중공을 분명히 소련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유익인 전쟁이 되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이 되고, 만일 미국이 참전하면 한편으로 미국의 군대를 분산시켜 유럽이 안전하게 되고,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되어 중공을 분명히 소련 편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것이다. 스탈린에게 한국전쟁은 꿩먹고, 알먹는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어떤가? 미국은 원래 한반도 문제의 관할은 유엔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한국과 같이 직접 전쟁 당사국이 아닌 전쟁의 결과로 해방된 지역은 유엔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유엔을 내세워서 한반도를 관리하기를 원했고, 한반도의 전쟁을 통해서 소수의 공산주의 대 다수의 유엔의 구도로 만들어 가기를 원했다. 결국 미국의 이런 전략은 성공했다. 그래서 16개국이나 되는 국가들이 미국과 함께 유엔의 이름으로 한반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제 냉전에서 세계지형은 소수의 공산주의 국가 대 다수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소련은 중국을 얻었지만 미국은 대다수의 국가를 자유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서방진영 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영국은 막대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정책은 민족의 자결권을 강조하는 대서양헌장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미국과 상당한 갈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미국과 소련,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게 되고, 이제 어느 한 쪽에 속해야 했다. 사실 6·25 전쟁은 이런 서방 진영을 하나로 묵게 만들었다. 영국은 한국전쟁에 상당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제 서방진영은 미국의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6·25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세계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었고, 과거 전체주의와의 투쟁 시대보다도 더 길고, 엄격한 국경통제가 이루어졌다. 무역도, 외교도 자신의 진영 안에서만 이루어졌다. 이런 국제질서의 변화가 한반도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가? (계속)

박명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명수 #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