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와 예배자의 자세

오피니언·칼럼
칼럼
  •   
신성욱 교수

아무도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해서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복병 말이다. 2019년 12월 12일 중국 우한에서 첫 감염자가 발생한 것을 기점으로 해서, 현재 18개국을 넘어 확산되어 확진 환자만 6천 명을 넘어서고, 사망자가 132명에나 달하는 비극을 맞고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교회에서도 확산 방지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예배 이전에 소독작업을 실시하고, 악수 대신 팔을 부딪쳐 인사하고, 마스크를 낀 채로 예배드림을 허용하는 등, 혹시나 모를 감염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모두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던 중 1월 26일 21번째의 확진자가 6번 확진자와 함께 서울 종로에 위치한 명륜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로 명륜교회는 예배당을 폐쇄하고 2일 주일예배, 5일 수요예배, 그리고 9일 주일예배를 각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영상을 통해 대신 드리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에 예배나 설교를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대체하게 하는 방안을 고심 중인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9일 주일예배 시에는 분당우리교회 담임 이찬수 목사가 감염우려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교인들을 배려해서 당분간 미리 녹화한 설교영상으로 예배드릴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한 가지 심각한 질문 하나가 기독교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바이러스 감염 확산을 방지할 목적으로 한시적으로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위험적 요소가 있다고 예배를 포기할 순 없으니 반드시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림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옳은가?’라는 질문 말이다.

어제 기독교 신문 기자 한 명이 전화로 이에 관한 인터뷰를 요청해서 그 내용이 기사화 된 적이 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단 증거다. 메르스 사건 때 이미 경험한 바 있긴 하지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가 늘 드리는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심각한 질문을 되던지게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보수 기독교인에 속한 이 중 적지 않은 성도들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을 본다. 즉 그들은 로마 시대의 성도들을 실례로 들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일예배를 교회에서 드리는 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로마에 처음 들어가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을 무렵, 로마 도시에 염병이라는 전염병이 돈 적이 있었다. 당시 로마 시내 길거리 곳곳에는 죽어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로 가득 찼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체에 손을 대자마자 전염되어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시내는 사람들의 시체가 길거리마다 쌓여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로 인해서 악취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한 밤중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며칠 후에 로마의 시내는 시체가 모두 치워지고 깨끗한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도대체 저들이 누구일까?’ 모두가 궁금해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바로 로마 정부의 핍박을 피해 카타콤으로 숨어들어갔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로마가 기독교로 공인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신을 수습한 성도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손이 그들로 하여금 전염되지 않도록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 기독교인들도 생사화복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환자들을 돌보면서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예배도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이들의 견해를 높이 존중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들을 치우는 구별된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물론 이 생각에도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교회가 반드시 건물로 된 장소여야만 하는가?’라는 것이다. 원래 ‘교회’란 헬라어로 ‘ecclesia’라고 한다. 이것은 ‘ek+caleo’(~로부터 부름 받다)의 명사형인데, 그 의미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게 부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장소가 아닌 ‘신앙고백을 한 무리들과 그들의 모임’ 말이다.

초대교회나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을 보라.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는 이들을 위한 필수코스가 그 일곱 교회들을 하나씩 방문하는 일이다. 에베소 교회를 필두로 해서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기념교회를 둘러보는 동안 순례자들은 엄청난 도전과 감격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기념교회가 세워진 자리들이 처음 일곱 교회가 존재했던 그 장소들이 아님을 대부분은 모르고 있다. 당시는 건물로서의 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던 때였다. 때문에 가정에서 지하에서 숨어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고 감염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교회에서의 예배를 취소하고 가정에서의 예배로 대체하는 초강수를 두는 시도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예배당이라는 건물보다는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하는 성도들 하나하나’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에서의 예배만을 억지로 고집하다가 감염자가 늘어나고 사망자까지 생겨난다면 교회가 어떻게 책임지겠는가? 한 마디로 풍비박산이 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추락되고 교회를 향한 세인들의 조롱과 비난은 지금보다 더욱 심화되고 말 것이다.

물론 주의해야 할 점은, 가정에서 편하게 예배를 드리다가 신앙의 자세가 해이해지거나 게을러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히 10:23b~2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가정에서든 예배당에서든 개인이나 가족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위험이 있더라도 반드시 교회라는 정해진 장소에서 예배를 드림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고집하는 이들의 중심도 존중하고, 교회 공동체에 위기가 닥쳐 하나님 영광을 가리거나 무식한 외골수라는 조소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바이러스가 종료될 때까지만이라도 가정에서 예배드리자는 이들의 중심도 존중해야 한다.

살전 5:11절이 이 글의 결론을 맺어준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도 필요하지만 교회에 덕을 세움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고, 융통성 있고 탄력성 있는 신앙의 자세로 판단하고 결정함이 지혜임을 기억하고 살자.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