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수용소, 그 죽음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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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수용소로 북송당한 드보라 탈북민 선교사, 오픈도어 5월호에서 탈북 수기 전해
©오픈도어선교회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공안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다시는 푸른 하늘을 못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두고 온 딸이 생각났다. 이제 막 돐을 넘긴 우리 딸... 아직 젖도 떼지 못한 딸아이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나는 막무가내로 잡아가는 공안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 잠깐 할말 있소. 우리 딸이 지금 막 돐이 지난 간난 아이라 아직 젖도 떼지 못했소. 나 좀 보내주시오” 그렇지만 공안은 매정하게 무조건 조사부터 받으라고 말했다. 조사를 받으러 공안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거리에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뿐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돈 벌러 나온 거라고 계속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울부짖음은 통하지 않았다. 조사관은 나를 구류장에 집어넣었다.

구류장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중국 여성들이 나와는 다른 죄목으로 갇혀있었다. 구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젊은 조선 처자가 여기 왜 왔는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내가 하도 울기만 하니까 구류장에 계신 분들이 불쌍하게 생각해서 나를 위로하면서 다시 넘어올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면서 5원, 10원씩 돈을 모아서줬다. 그때 당시 나는 한국에 넘어갈 생각으로 집에서 추수하고 번 돈 1,500원을 숨겨온 상태였기에 구류장의 언니들이 주는 돈이 그렇게 큰 도움은 아니었지만 많은 격려가 되었다.

나는 1주일 만에 북송을 당했다. 다리 건너 북한 땅으로 오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보위부 요원들은 우리에게 쌍욕을 하면서 혹시 중국에서 숨겨온 돈이 있으면 지금 바치면 40%는 국가에 바치고 60%는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며 돈 숨긴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물론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개중에 몇 명이 돈을 바치기도 했지만 약속대로 돈을 돌려받은 사람은 없었다.이어서 신체 검사를 빙자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보위부원의 지시를 따라 모든 사람이 옷을 벗어야 했다. 옷을 다 벗자 이번에는 반복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고문을 시켰다. 소위 펌프 고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돈을 자궁 안에 감춰 놓았었다. 혹시나 그 돈이 빠질까 조마조마해가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기 시작했다. 보위원은 300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보위원의 똑바로 하라는 호통 소리에다가 붙잡힌 이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허약한 상태였던 지라 곧 머리 속이 새하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돈이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지만 한 50번쯤 했을까… 아니나다를까 자궁 안에 숨긴 돈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아직 간부가못 봤을 때 다시 숨기려고 손으로 돈을 집으려고 했지만 간부의 발길질이 먼저 날아왔다.“이 간나 XX, 이 더러운 돈 좀 보라우, 어딜 속이고 돈을 숨기고 있는 기야! ”결국 나는 돈을 다 뺏기고 심하게 두드려 맞았다. 때리는 매도 아팠지만 그보다 먼저 “내 생명줄이 끊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위부 감옥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땀내, 화장실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잘 때 다리를 쭉 뻗고 잘수 없어서 다리 위에 다리가 겹쳐서 누웠다. 식사시간이 되니까 밥을 주는데 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건이었다. 누런 옥수수 국수를 물을 한 가득해서 끓인 것인데 국물 색깔만 누런 빛이 있었다. 게다가 국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그것을 작은 공기에다가 3-4숫가락 퍼주면 쭉 마시는 것이다. 나는 너무 냄새가 매스꺼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코를 막고 불편한 속을 붙잡고 있으니까 옆에서 안 먹을 거면 자기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내 밥그릇을 받자 마자 허겁지겁 그 국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밥을 한끼 안 먹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 배가 고팠다. 별이 머리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같았다.조사를 받고 자백서를 써야 되는데 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냄새가 고약하고 먹을 만한음식이 아니더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식사시간이 되었고 이번에는 눈 딱 감고, 코 막고 그 옥수수국물을 쭉 들이켰다.

식사를 하고 2-3시간 정도 흘렀을까… 뱃속이 엉망이 되었다. 계속 화장실에서 설사를 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의식을 붙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먹어야 되니 식사시간에 나오는 국물을 계속 먹었다. 그렇게 먹고 설사를 하기를 3일을 정도 지나니 항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날도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을 떴더니 사람들이 ‘이년이 아직 안 죽었다…’ 하고 수군거렸다. 알고 보니 화장실에서 쓰러진 나를 사람들이 발견하고 끌고 왔지만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간수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더니 “이 간나 뒤지지 않고 살았네 명도 길다” 하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쳤다. 간신히 깨어난 나는 내 처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포와 북송, 조사와 고문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섭섭했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아무런 약도 쓰지 않고 방치했을 뿐 아니라 깨어난 사람에게 명이 길다며 조롱하며 지나가는 간부의 모습에서 조국이 나를 심하게 천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비록 탈북은 했지만 내가 조국이 싫어서 강을 건넜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국 시골 깡촌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지적하고 김정일을 욕할 때 앞장서서 김정일 장군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지 아느냐며 변호했고, 어머니 조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악을 쓰며 변호했던 조국은 내가 죽어갈 때 돌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약 한 주먹 주지 않았다. 원래 배신감이 더 억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서러움과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살아서 이 나라를 고발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두려움에 떨다가 갑자기 분노와 고발의 의지가 생기자 이상하게 담대해졌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공안들의 추적에 걸려 집에서 잡혀온 탈북 여자는 보통 노동 단련대 형을 받았지만 한국행을 하다가 걸리면 예외 없이 교화소 행이었다. 기간도 최소 4년 이상이었다. 열악한 감옥의 위생과 식사, 심한 강제 노동, 악화된 건강상태 등을 생각할 때 4년 징역은 거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한국행을 하다가 붙잡힌 나는 당연히 교화소행일 것이고, 이 몸 상태로 교화소에 가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 죽음의 장소에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음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본 수기는 오픈도어 5월호 '나의 출애굽기'에서 드보라 선교사의 탈북 증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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