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방법론이라는 미명으로 신약학에서 성령체험을 배제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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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약학회 주제발표에서, '신약학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이승현 호서대 교수 발제
호서대 이승현 교수가 마이크를 들고 발제하고 있다©한국신약학회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2019년 한국신약학회 정기학술대회가 장신대 소양관 510호에서 13일 오전 10시부터 개최됐다. 주제 발표로 이승현 호서대 교수가 ‘신약학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발제했다. 그는 신약에서 복음서와 서신서가 '정경'으로 정착된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1-2세기 복음서나 서신서는 지금만큼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문서화된 복음보다 예수의 제자들로부터 구전된 전승(傳乘)에 더 권위를 두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문서화된 복음서는 그 자체로서 권위를 지니기보다, 당시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더 잘 알기 위한 참고”였음을 밝혔다. 2세기 교회사가 였던 유세비우스(Eusebisu)는 그의 기록에서 “저는 책들로부터 얻는 정보가 살아 있는 음성으로 전달되는 말씀보다도 더 저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이유로 그는 “예수가 어떤 책도 기록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남기라고 명령하지 않은 사실과 결부 된다”고 했다. 또 그는 “2세기 초반까지 예수의 가르침이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 및 교회 선생들을 통해 구전으로 생생하게 증거 됐기에, 교회들은 문서의 필요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2세기 중반에 이르러, 복음서와 서신서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급변했다”고 전했다. 가령 그는 초대 교부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를 빌려 “2세기 중반 로마교회는 복음서들을 구약성서와 함께 사용했다”며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예수의 말씀과 그 권위가 복음서의 문서들에게 동일하게 전가됐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2세기 중반부터 성도들은 문서화 된 형태의 복음서들을 성경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또 이 교수는 2세기 서머나 교회 감독인 폴리캅을 인용해, 바울 서신서의 권위도 성경에 준하는 위치로 점차 확립됐음을 설명했다. 폴리캅은 “1세기 말경 바울의 서신서는 복음서들의 권위에 못지않게, 교회들 간 회람되고 공유됐다”고 말하며, 이 교수는 “바울서신이 이제 모든 이방인 교회들을 향한 일반적 가르침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문서화된 복음서 및 서신서가 정경으로 인정받게 된 연유는 무얼까? 그는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새롭게 이해한 예수를 문서 형태로 생생하게 재 기억되길 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제자들은 기록된 문서가 예수 이해에 대한 종결적 선언으로 화석화되는 걸 원치 않았다”며 “예수 전통이 문서를 통해 전달됨과 동시에, 구전(口傳)을 통해서도 예수 이해의 층위가 더욱 확장되기를 바랐다”고 진술했다. 그런 연유에서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신앙의 표현물에 가깝다”고 그는 부연했다.

호서대 이승현 교수 ©이승현 교수 제공

바울 서신서도 마찬가지라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서신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의미 있게 적용된 신학적 결과물”이라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신서 또한 사도들의 최종적 선언(the last word)이 아니”라며 “예수 복음이 제자들의 삶속에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에 대한, 현재 진행형의 신학적 표현”이라고 역설했다.

때문에 그는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예수 가르침이 후대교회들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는 신학함의 과정과 함께 갔다”고 밝혔다. 즉 그는 “예수 복음의 능력으로부터, 후대교회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발견해 가는 신학함의 결과물”이라며 “신약성서가 후대교회들에게 전달되고 재인식되는 과정에서 정경화는 발전되고 확고해졌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그는 신약 성경의 정경화과정이 영지주의와의 논박을 통해 가속화 됐음도 밝혔다. 그는 “2세기 초·중반 말시온이라는 영지주의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구약을 무시하고, 예수 탄생의 부분을 삭제한 누가복음 및 10개의 바울 서신서들만 성경으로 간주했다”고 지적했다. 영지주의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과 성육신을 부정하는 초대 이단 교리다.

따라서 그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빌려, “2세기 교회들이 자신들의 신앙적 규범과 교리적 통일을 견고히 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바울 서신서와 복음서를 똑같이 수집했던 이단들과의 갈등”을 통해서, “1-2세기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권위 있는 규범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증명해야 했다”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신약성서의 정경화 과정은 27권의 책들을 선별하는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며 “도리어 예수를 궁극적 삶의 규범으로 믿고, 신앙과 삶에 적용하기 위한 치열한 신학함의 결과물”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신약학회

한편 그는 18세기부터 신약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한 신약학 방법론도 소개했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신약학의 주도적 방법 중 하나는 고등비평이었다”고 했다. 이른바 “신약성경을 여러 인간 문서들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권위를 격하시킨 측면도 다소 있다”고 지적하며, 그는 “성경의 권위를 절대시하던 교회들과 성경의 권위를 비판했던 신약학 간 충돌은 불가피했다”고 전했다. 이런 간극 때문에, 그는 “교회와 신약학 간 호혜적 관계를 통해 서로 영감 받고 발전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고 꼬집었다.

이 대목에서 이 교수는 신약학과 신학을 외면한 보수적 교단 간 교류가 필요함을 재차 말했다. 먼저 그는 “현대 신약학은 단순 신약성서에 대한 객관적 분석 차원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신약성서로부터 예수적 삶을 끊임없이 배우려했던 고대 및 현대 교회들의 노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그는 “교회 또한 열린 마음으로 신약학과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유로 그는 “학문적 비판이 결여된 보수주의적 신앙은 동일한 견해만 재생산함으로, 복음의 역동성을 상실한 문자적 신앙에 머무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때문에 그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교회도 신약학의 연구 결과를 참고해, 자칫 왜곡된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도 경청해야 한다”고 재차 말했다.

화제를 전환해, 이 교수는 신약학 내부의 학문 연구 방법론의 개혁도 역설했다. 그는 “그간 신약학 내부에선 역사비평에 대한 낭만적 신봉이 있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역사비평이 객관적 사실을 통해서 입증된 과학이 아니”라며 “다양한 가설들을 통해 역사비평이 수행돼 왔다는 사실”을 전하며, 역사비평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가령 그는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 했던 학문적 시도는, 신약학자들 간 하나의 예수가 아닌 여러 명의 상이한 예수들을 발견했다”며 “역사적 예수들은 학자들의 개인적 견해들로 재구성 된 측면이 강했다”고 비판했다.

또 그는 “한 때 유행했던 Q 복음은 실증적인 Q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체적 Q문서의 범위가 확정되지 않은 채, 그 존재는 학자들의 입맛에 따른 공관복음서의 재구성에 의존했다”고 지적하며, “학자들의 논의가 객관적 사실보다 개인적 추론에 더 영향 받은 부분도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신약학자들은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맹신과 과학의 우상화 속에 갇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현재 과학적 방법론이 다음세대에는 더 이상 과학이 아닐 수 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구나 그는 “종교적 체험을 객관화라는 미명아래, 학문적 대상에서 배재”하는 신약학 방법론의 한 측면도 지적했다. 그는 “더 심각한 건 종교적 체험을 학문에서 논하는 게 학문의 수준을 떨어뜨린다 생각하는 일부 성경학자들의 편견”이라며 “신약성서는 그 시작과 정경화 과정에서, 저자들 및 해석 공동체들의 종교적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했다.

이유로 그는 “신약성서를 규정한 결정적 사건은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다시말해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은, 그들에게 세상의 주되심은 로마 황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증케 했다”며, 비교로 막 12:35-36, 14:61-62. 행 7:5-6, 빌 2:6-11을 제시했다. 당시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면 사자(Lion)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들 및 초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현재 삶에서 경험하는 로마 황제의 주권보다 더욱 실체적 이었다”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예수를 만난 성령체험이 그들의 생각 뿐만 아니라 삶과 행동을 바꾼 셈이다.

특히 그는 “제자들 및 초대 교인들이 경험했던 종교적 체험은 복음서 및 서신서의 기초였다”며 “신약성서의 전파로, 끊임없이 삶에서 체험한 성령 체험은 신앙과 신학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켰던 기폭제였다”고 힘주어 말했다. 가령 그는 고전 2:9-16을 빌려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전했다. 하여 그는 “바울 스스로도 예수에 대한 깨달음을 공동체에 적용하는 기준은 오로지 성령임을 누누이 말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정경화의 중요한 기준들은 신앙적 규범(regula fidei) 및 사도적 기원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 왜냐면 그는 “사도들의 글이 성경적 권위를 가진 이유는 그들의 생각을 주장한 게 바로 성령 때문”이라는 Canon muratori의 기록을 인용했다. Canon muratori는 1740년 이태리 고고학자 Muratori가 발견했던 가장 오래된 성서이며, 180년 경 로마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4복음서, 야고보서,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히브리서, 그리고 바울의 13개 서신이 포함됐다. 이 부분에서 이 교수는 “유대인들과 교회들은 성서의 저자들인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을 통해 성서를 기록했다고 믿었다”며 비교로 고전 7:40, 딤후 3:16, 벧후 1:20-21, 계 22:18-19을 전했다.

따라서 이 교수는 “성령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신약성서 저자들의 견해를 존중해, ‘신약성서의 정경화 기준들’ 중 하나로 정립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Canon muratori에 요한 2, 3서, 요한계시록, 유다서, 베드로 후서 등이 추가되고 이레니우스(Irenaeus)가 넣었던 헤르메스의 목자서신은 외경으로 제외된 채, 395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했다.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곧 신약성경 27권을 정경화 시킨 셈이다.

이승현 교수의 발제 이외에, 김덕기(대전신대)교수가 “신약학은 어떻게 공동체의 위기와 혼돈을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 -고린도전서 5-6장의 신학적 사유방식을 중심으로-”를 발제했다. 패널에는 허주(아세아연합신대) 교수, 논찬에는 채영삼(백석대), 유은걸(호서대) 교수가 수고했다.

©한국신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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