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으로 기독교인들 모두 대공 투쟁에 앞장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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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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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1910~2017),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 주제로 2017 양화진 역사강좌
윤정란 박사(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 ©조은식 기자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지난 100년(1910~2017),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주제로 '2017 양화진 역사강좌'가 진행 중에 있는 가운데, 16일 저녁에는 윤정란 박사(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가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의 한국교회"를 주제로 발표했다.

윤정란 박사는 "3년여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와중에 기독교인들의 피해도 막심했다"고 말하면서 발표를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교역자들은 장로교 약 300명(남한 30명, 북한 260명), 감리교 약 80명(남한 30명, 북한 50명), 성결교 약 20명, 구세군 8명 등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또 전소된 교회당만도 장로교 1,113(남113, 북 약 1,000)곳, 감리교 약 200(남 84, 북 120)곳, 성결교 약 60(남 27, 북 30)곳 등이었으며, 반쯤 불탄 교회당은 장로교 428곳, 감리교 155곳, 성결교 79곳, 구세군 4곳 등이었다고 한다.

KNCC

이 와중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예수교장로회뿐만 아니라, KNCC도 주도하게 되었다. 윤 박사에 따르면 공산 세력을 가장 두려워했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어느 조직보다도 가장 신속하게 대응 태세를 갖췄는데, 이러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단체가 KNCC이였다고 한다.

KNCC는 1946년 창립되었는데, 당시 모든 교파와 교회 기관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윤 박사는 "KNCC가 한국전쟁 때 WCC와 관련된 세계교회의 모든 대회에 참석해 전쟁지원을 요청했고, 한국에서 세계교회의 전쟁지원 물자를 독점적으로 받는 창구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KNCC 창립 초기에는 각 교파가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활동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KNCC는 예수교장로회가 중심이 되었으며, 대응 과정에서 한경직 목사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KNCC 주요 인물로 급격히 부상했다고 윤 박사는 설명했다.

서북청년회

더불어 서북출신 기독교인들과 '서북청년회'는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고 윤 박사는 설명했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 결성되어,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의 결성으로 해체된 대표적인 우익 청년 단체이다. 당시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 학생회와 청년회는 서북청년회 중심 세력이었다고 한다.

서북청년회는 1948년 단독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이승만과 정치적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여순사건 이후 점차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 단체 출신들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고 한다. 윤 박사는 "이 단체 출신들이 이후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반공주의

윤정란 박사는 "한국기독교가 한국전쟁을 통해 교회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반공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으며,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대공 심리전과 사상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반공을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켰다"고 했다.

이어 윤 박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인식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당시에는 전멸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협력하면서 민족운동에 나섰다"고 했지만,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대공 투쟁에 앞장서게 됐다"고 했다.

특히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 기독교인 중 일부는 전쟁을 신의 심판으로 이해하기는 했지만, 대다수 기독교인은 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사탄'과 동일시했다"면서 "이러한 사탄론과 함께 선민의식, 구원론 등도 등장했는데, 이런 사고를 기반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전투적 반공주의자'가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 중후반 이후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공을 재정의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윤 박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승만 정권이 주장하는 맹목적이고 전투적인 반공주의를 비판했다"고 지적하고, "대신 반공을 민주주의 질서 확립과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했다"고 전했다. 즉, 승공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7 양화진 역사강좌가 열리고 있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내 강연 모습. ©조은식 기자

또 이들은 반공을 이와 같이 재정의함과 동시에, 이를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윤 박사는 "공산주의와의 사상전을 위해 '기독교사상'을 창간하고, 기독교인들의 단결을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을 펼쳤으며, 사회적 빈곤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들과 연대하고자 산업전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때문에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기독교인들의 반공 재 정의는 4.19를 지지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4.19 이후 한국사회는 월남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이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반공을 다시 주장하면서, 5.16을 지지했다. 윤 박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승공 담론은 5.16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재구성됐다"고 했다.

이후 승공 담론은 군사정권에 의해 국시로 승격된다. 가난은 죄이며, 승공을 위해서는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반공이 국가적 차원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윤 박사는 "군사정권과 승공을 제기한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을 비롯한 한국 기독교들과의 결합,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대다수 한국인의 승공론에 대한 지지는 한국사회를 경제적으로 성장시키는 강력한 원천이 됐다"고 했다.

한편 오는 3월 30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홍보관에서 열리는 이번 역사 강좌는 2회의 강연이 남아 있다. 장규식 교수(중앙대 역사학과)와 변상욱 기자(CBS)가 각각 "개발 독재 시기의 한국교회와 국가"(23일)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교회의 위기와 과제"(30일)를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다. 문의: 02-332-9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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